책을 통째로 외울 수 없다면, 무엇을 기억해야 할까

2025. 12. 18. 17:17시험도, 일상도 기억이 답이다

책을 통째로 외울 수 없다면, 무엇을 기억해야 할까

 

책 한 권을 통째로 외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단 한 줄의 빈틈도 없이 머릿속에 입력해두고, 시험장에서 그 페이지를 펼치듯 문제를 풀 수 있다면 얼마나 마음이 든든할까. 아마 누구나 한 번쯤은 그런 상상을 해봤을 것이다. 물론 나도 그랬다. 중고등학교 때, 나는 교과서를 눈으로 읽고 또박또박 써가며 통째로 외우려 애썼다. 그 시절엔 한 문장도 놓치지 않겠다는 각오로 줄을 긋고, 색을 칠하고, 반복해서 입으로 되뇌었다. 객관식 시험이었기에 어느 정도는 효과도 있었던 것 같다. 문제는 그 방식이 대학에 와서는 더 이상 통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암기를 열심히 했지만 막상 서술형 문제가 나오면, 내가 외운 문장이 아닌 내 말로 답을 써야 했다. 딱딱한 문장 속에서 키워드를 잡아내지 못하면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통으로 외운 문장은 조금만 흐름이 달라져도 전부 무너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통암기는 너무나 많은 시간을 잡아먹었고, 잊혀지는 양도 상상을 초월했다. 머릿속에 넣는 데 들인 시간만큼, 빠져나가는 속도도 빨랐다. 그래서 나는 방식을 바꾸기 시작했다. 핵심 키워드를 중심으로 외우는 연습을 한 것이다. 책 전체를 외우는 대신, 출제 가능성이 높은 단락을 분석하고, 그 안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어들만 추렸다.

그랬더니 주관식 시험에서도 핵심을 중심으로 내용을 구성할 수 있었고, 기억도 더 오래 남았다. 하지만 여기서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키워드의 양이 많아지면 그것도 역시 버겁다. 대학원을 가고 나서부터는 키워드보다 먼저 뼈대, 줄기부터 잡았다. 시험이 어떤 흐름으로 출제될지, 교수의 수업 방향이 어디로 향하는지, 어떤 문장으로 답안을 구성할 수 있을지를 머릿속에 그린 다음, 그 구조 안에 내용을 채워넣었다.

그리고 50대가 넘어서 다시 자격시험을 준비하면서는 더 달라졌다. 책을 무작정 외우는 것이 아니라, '책을 보는 방식 자체'를 바꾸게 된 것이다. 목차를 먼저 살폈고, 목차에서 흐름을 파악한 후 어떤 개념들이 반복되고 중요한지 구조를 잡은 뒤 암기를 시작했다. 어릴 적엔 무대포로 외웠다면, 지금은 흐름 속에서 외우고 있다. 암기력은 예전 같지 않다. 그러니 더더욱 전략이 필요했다.

국가자격시험은 학교시험과는 또 다르다. 어떤 시험은 1년에 세 번의 기회가 있고, 어떤 건 단 한 번뿐이다. 세 번 칠 수 있는 시험이라면(임상심리사 2급) 한두 번은 실전처럼 연습삼아 볼 수도 있지만, 일 년에 한 번뿐인 시험(청소년상담사)이라면 말이 달라진다. 기본서를 한 번 읽는 데만 몇 개월이 걸리고, 그다음엔 기출문제, 예상문제, 요약집, 단권화… 할 게 산더미다. 그래서 사람들은 말한다. 반복이 중요하다고. 회독을 많이 하라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이해하지 못한 반복은 아무 소용이 없다. 시험은 시간이 부족해서 틀리는 게 아니라, 아는 듯 모르는 정보가 흐릿해서 틀린다. 결국 기억에서 꺼내지 못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회독의 양보다 중요한 건, 내 머리로 설명할 수 있는 정보가 얼마나 되느냐다. 인출 훈련 없이 머릿속에 정보만 쌓아봐야 시험장에서 꺼내지 못하면 말짱 도루묵이다. 기억은 꺼낼 수 있을 때 비로소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는 인간이다. 시험을 한두 달 앞두고 나면 불안이 고개를 든다. 마음이 조급해지고, ‘뭘 더 봐야 하지’ 하는 생각이 꼬리를 문다. 집중이 안 되고, 하던 계획은 흔들리고, 효율은 급격히 떨어진다. 특히 시험을 2주 앞둔 시점의 불안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필자도 그 시기를 여러 번 겪었다. 그럴 때마다 시간표를 다시 짜고, 불안을 쫓기 위해 자투리 시간에 단어장을 꺼내고, 잠들기 전 마지막으로 암기노트를 확인했다.

그렇게 불안과 맞서면서도 끝까지 공부를 멈추지 않은 건, 결국 내가 하고자 하는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국가자격증 시험이든, 기술직 시험이든, 전문적인 시험이든, 누구에게나 시험은 부담이고 도전이다. 하지만 그 도전 앞에서 포기하지 않고, 내 방식대로 공부하고, 끝까지 스스로를 다잡아 나아가는 과정 자체가 아름답다고 나는 믿는다. 책 한 권을 다 외우지 않아도 된다. 다만, 시험에 필요한 내용을 ‘내 언어’로 이해하고, 기억하고, 꺼낼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결국 시험에 강한 사람은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니라, 필요할 때 필요한 정보를 꺼낼 줄 아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건, 누구나 훈련할 수 있다. 나이와 상관없이. 지금 이 순간부터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