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력은 외우는 힘이 아니라, 이유를 붙잡는 힘이다

2025. 12. 18. 11:44시험도, 일상도 기억이 답이다

기억력은 외우는 힘이 아니라, 이유를 붙잡는 힘이다

기억력을 높이는 방법이 뭘까.
솔직히 말하면, 나 역시 한동안은 답을 단순하게 생각했다. 더 많이 보고, 더 오래 붙잡고, 더 열심히 외우면 기억력이 좋아질 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분명해졌다. 무조건 외운다고 기억력이 좋아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이유 없이 외운 건, 이유 없이 사라진다.

특히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면서 이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예전처럼 그냥 문제집을 반복해서 읽고, 줄 치고, 외우다 보면 될 줄 알았다. 그런데 머릿속에 남는 게 없었다. 하루 전에 외운 것도 다음 날이면 흐릿해졌고, “이거 분명 본 건데…”라는 말만 반복하게 됐다. 답답했다. 공부를 안 한 것도 아닌데, 기억이 따라주질 않았다.

그러다 문득 질문을 바꿨다.
‘나는 왜 이 자격증을 따려고 하는 걸까?’
이 질문을 진지하게 붙잡고 나서부터 공부가 조금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 자격증이 내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이 시험이 나에게 어떤 기회를 열어줄 수 있는지, 그리고 이 과목들이 왜 이 시험에 들어가 있는지를 하나씩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비로소 공부가 ‘외움’이 아니라 ‘이해’로 바뀌었다. 과목을 쪼개서 보고, 이론을 뜯어보며 “이건 그래서 필요한 거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순간들이 생겼다. 신기하게도, 그렇게 이해한 내용은 굳이 애쓰지 않아도 조금 더 오래 머물렀다. 기억이라는 게, 결국 목적을 알아볼 때 비로소 자리를 잡는다는 걸 그때 알았다.

시험이라는 상황도 기억을 돕는다. 평소라면 그냥 스쳐 지나갔을 내용도, 시험을 앞두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한 번 더 생각하게 된다. 이게 왜 중요한지, 어디서 나올 수 있는지, 어떤 식으로 묻힐지를 떠올리게 된다. 그 ‘한 번 더 생각함’이 기억을 조금 더 깊게 만든다. 물론, 그마저도 반복하지 않으면 사라진다. 그게 현실이다.

문제는 공부하는 속도보다 잊는 속도가 더 빠르다는 데 있다. 어제 외운 게 오늘 사라지고, 오늘 정리한 게 내일이면 낯설어진다. 그럴 때마다 마음이 급해진다. 하지만 요즘 나는 그 순간을 조금 다르게 대한다. 잊어버렸다는 사실에 좌절하기보다, “아, 다시 떠올릴 기회가 왔구나”라고 생각해보는 연습을 한다. 잊어버린 걸 다시 기억해내는 그 과정에서, 묘한 작은 즐거움이 생긴다. 기억이 다시 돌아오는 느낌, 그게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

기억에는 종류가 있다. 아주 짧게 머무는 기억도 있고, 며칠 지나면 흐려지는 기억도 있다. 의미기억이라는 건 특히 그렇다. 며칠만 지나도, 아무리 애써 떠올리려 해도 잘 떠오르지 않는다. 반면에 어떤 기억은 몇 년이 지나도 생생하다. 장기기억이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

답은 의외로 단순하다. 감정이다.
기억은 감정과 연결될 때 오래간다. 기뻤던 순간, 두려웠던 순간, 긴장했던 순간과 함께 저장된 기억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스토리가 있는 기억은 강하다. 상황이 떠오르고, 장면이 떠오르고, 그때의 감정까지 함께 따라온다. 단순히 외운 정보와는 차원이 다르다.

그래서 나는 요즘 기억하고 싶은 내용을 억지로 외우기보다, 상황과 연결하려고 한다. 왜 이걸 알아야 하는지, 어디에 쓰일지, 이걸 모르면 어떤 불편함이 생길지 같은 질문을 던진다. 가능하면 이미지로 떠올리고, 경험과 연결하고, 나만의 이야기로 바꿔본다. 그렇게 만든 기억은 확실히 오래간다.

반복의 힘도 무시할 수 없다. 남자들이 군대에서 배운 기술이나 훈련을 잘 잊지 않는 이유는 특별한 재능 때문이 아니다. 반복 때문이다. 몸이 기억할 때까지, 생각하지 않아도 나올 때까지 반복했기 때문이다. 운전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연수를 받아도 실제로 차를 몰고 도로에 나서지 않으면 실력이 늘지 않는다. 기억도 그렇다. 반복해서 꺼내보고, 다시 떠올리고, 다시 써먹을 때 비로소 내 것이 된다.

우리의 뇌도 사실 그 원리에 따라 움직인다. 외부에서 들어온 정보는 그냥 저장되지 않는다. 일시적으로 머물다가,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되면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하지만 자주 불려 나가고, 계속해서 교류가 이루어지면 뇌는 그 정보를 ‘중요한 것’으로 인식한다. 그래서 다시 저장하고, 오래 보관한다. 기억은 그렇게 선택된다.

결국 기억력을 높인다는 건, 더 똑똑해지는 문제가 아니다. 무엇을 붙잡고, 무엇을 반복할지 선택하는 문제다. 이유를 만들고, 감정을 붙이고, 자주 꺼내보는 것. 그 단순한 원칙을 받아들이는 순간, 기억은 조금씩 다시 살아난다.

나는 아직도 잊어버린다. 여전히 느리다. 하지만 예전보다 덜 두렵다.
기억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길을 잃을 뿐이라는 걸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길은, 다시 만들어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