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08] 청중은 왜 설교를 떠나는가

2025. 12. 20. 10:36인간이 묻고 인공지능이 답하다

[연재08] 청중은 왜 설교를 떠나는가

요즘 교회 안에서 자주 들리는 말이 있다. 사람들의 집중력이 짧아져서 설교를 견디지 못한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설교는 더 짧아져야 하고, 더 흥미로워야 하며, 더 자극적이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그러나 청중이 설교를 떠나는 이유를 설교의 길이에서만 찾는다면, 문제의 핵심을 비켜가고 있는 셈이다. 청중이 설교에서 멀어지는 이유는 길이가 아니라 공감의 부재에 있다.

사람들은 긴 말보다 자신을 이해해 주는 말을 원한다. 완벽하게 구성된 설교보다, 자기 삶을 건드리는 설교에 더 오래 머문다. 오늘의 청중은 설교자의 말솜씨보다 그 말이 어디에서 나왔는지를 본다. 말씀이 삶과 연결되지 않을 때, 설교는 아무리 정교해도 공허하게 들린다. 설교가 멀어질수록, 청중은 설교의 수준이 아니라 설교자의 진실성을 묻고 있다.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30-40분의 설교보다 3분내외 숏츠 설교를 원한다고 생각한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경우 중요한 부분을 보면 전체적인 흐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숏츠 영상을 선호한다. 그런데 숏츠설교는 내용만 보면 멋진 명언이나 핵심적인 내용을 파악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왜 그 내용이 나왔는지는 알 수 없다. 그래서 그렇구나로 끝난다. 설교는 설교본문이 말하는 내용과 설교자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지적으로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설교를 떠올려 보면 이 점이 분명해진다. 예수께서는 언제나 사람들의 삶 한가운데서 말씀하셨다. 갈릴리 호숫가에서 그물을 씻던 어부들에게, 들판에서 씨를 뿌리던 농부들의 일상 속에서 비유로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말씀은 길지 않았지만, 사람들의 삶을 정확히 짚어냈다. 그래서 무리는 그분의 말씀을 듣고 놀랐고, 기꺼이 머물렀다. 말씀은 그들의 현실과 떨어져 있지 않았다.

반대로 삶과 동떨어진 설교는 점점 설득력을 잃는다. 고난을 이야기하면서 고난의 현장을 모르는 말, 회개를 말하면서 자신은 안전한 자리에 머무는 말은 청중의 마음에 닿기 어렵다. 청중은 설교자가 완벽하길 기대하지 않는다. 오히려 연약함을 숨기지 않는 진실함을 원한다. 설교자가 말씀 앞에서 함께 씨름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때, 청중은 다시 귀를 기울인다.

설교자는 강단 위에만 서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회중보다 한 걸음 앞서 말씀을 들었을 뿐, 같은 길을 걷는 사람이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을 주장하면서도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고 고백했다. 그는 위에서 내려다보는 설교자가 아니라, 함께 복음의 길을 걷는 증인이었다. 그의 설교가 마음을 움직였던 이유는 논리의 탁월함보다, 함께 울고 함께 견딘 삶의 흔적 때문이었다.

설교는 내려다보는 말이 아니라 같이 서는 말이다. 청중을 가르치려는 말보다, 함께 묻고 함께 고민하는 말에 사람들이 반응한다. 설교자가 강단 위에서만 안전하게 서 있을 때, 청중은 거리감을 느낀다. 그러나 설교자가 말씀 앞에 자신을 먼저 내어놓을 때, 설교는 다시 다리가 된다. 그 다리를 통해 말씀은 청중의 삶으로 건너간다. 그런 점에서 숏츠로는 설교의 내용을 제대로 전달하기 힘들며, 표현하기도 쉽지 않다.

청중이 설교를 떠나는 시대가 아니라, 공감 없는 설교를 떠나는 시대를 맞이했다. 이 시대가 설교자에게 요구하는 것은 더 짧은 말이나 더 세련된 표현이 아니다. 함께 걷는 태도다. 설교자가 어디에 서 있는지가 분명해질 때, 설교는 다시 들리기 시작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청중의 눈높이에서 그들의 삶을 이해하면서 그 말씀을 실천하는 목회자의 설교가 성도들에게 변화를 가져온다. 짧은 영상이 아닌 깊이 있는 삶과 설교만이 사람들의 변화를 이끌 수 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