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06] 설교자의 정체성이 설교의 미래다.

2025. 12. 18. 18:58인간이 묻고 인공지능이 답하다

설교자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설교자의 정체성이 설교의 미래다

 

 

인공지능 시대에 설교자는 점점 불안해진다. 더 잘 정리된 문장, 더 논리적인 구조, 더 세련된 표현이 손쉽게 만들어지는 환경 속에서, 설교자의 역할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피할 수 없이 따라온다. 이 질문은 단순히 설교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설교자의 정체성 자체를 향하고 있다. 설교자는 과연 누구인가.

설교자는 콘텐츠 생산자가 아니다. 설교를 그렇게 이해하는 순간, 설교자는 언제든 대체 가능한 존재가 된다. 더 빠르고 더 정확한 도구가 등장하면 설교자의 자리는 흔들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설교자는 처음부터 콘텐츠를 만들어 내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말씀을 ‘만든’ 사람이 아니라, 말씀을 ‘받아 전한’ 사람이었다. 설교자는 창작자가 아니라 증인이었다.

베드로의 설교를 떠올려 보면 분명해진다. 오순절 날, 그는 준비된 웅변가로 강단에 선 것이 아니었다. 불과 얼마 전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를 다시 만난 후, 그는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증언했다. 그의 설교에 권위가 있었던 이유는 말솜씨가 아니라, 삶의 방향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사실 자체였다. 설교는 그 변화의 흔적 위에서 흘러나왔다.

설교자의 권위는 말의 기술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삶의 일치성에서 비롯된다. 말하는 것과 살아내는 것 사이의 간격이 좁아질수록 설교는 힘을 얻는다. 반대로 그 간격이 넓어질수록 설교는 공허해진다. 청중은 설교자의 논리를 기억하지 않는다. 청중은 설교자의 태도와 진정성은 오래 기억한다. 설교자는 강단 위에서만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라, 삶 전체로 설교하는 사람이다.

성경 속 선지자들은 언제나 말씀 앞에서 먼저 무너진 사람들이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보고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외쳤다. 에스겔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먹고 쓴맛을 경험했다. 예레미야는 말씀 때문에 눈물의 선지자가 되었다. 설교는 언제나 설교자를 먼저 흔들었다. 설교자가 먼저 말씀 앞에서 무너질 때, 그 설교는 비로소 살아 움직였다.

인공지능 시대는 설교자의 기술이 아니라 존재를 묻는 시대다. 얼마나 잘 말하는가보다, 누구로 서 있는가가 더 중요해졌다. 기술은 설교를 보조할 수 있지만, 설교자의 자리를 대신할 수는 없다. 설교자의 자리는 하나님 앞에 서는 자리이며, 그 자리에서 자신의 삶 전체를 걸고 말씀을 전하는 자리다.

그래서 오늘 설교자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나는 누구로 설교하고 있는가.” 전문가로 설교하고 있는가, 아니면 부르심을 받은 사람으로 설교하고 있는가. 정보 전달자로 서 있는가, 아니면 말씀의 증인으로 서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분명해질수록, 설교는 다시 힘을 얻는다. 설교자의 정체성이 바로 설교의 미래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