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2. 17. 18:49ㆍ인간이 묻고 인공지능이 답하다
[연재05] 본문 앞에 서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한다

설교를 준비하기가 어느 때보다 쉬워진 시대다. 본문을 입력하면 주해 자료가 정리되고, 원어 분석과 문단 구조까지 즉시 제공된다. 과거라면 수시간, 수일이 걸렸을 작업이 몇 분 안에 끝난다. 설교자는 더 많은 정보를, 더 빠르게 손에 넣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편리함은 설교자를 본문에서 더 멀어지게 만들었다. 해석은 쉬워졌지만, 본문 앞에 머무는 시간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주해 도구는 풍성해졌지만 묵상은 빈약해졌다. 본문을 반복해서 읽고, 이해되지 않는 구절 앞에서 멈추고, 질문하며 기다리는 시간이 설교 준비 과정에서 점점 사라지고 있다. 본문은 설교자를 붙들어 매는 말씀이기보다, 설교를 구성하기 위한 재료가 되었다. 그 결과 설교는 이전보다 정확해졌을지 모르지만, 듣는 이의 마음을 붙드는 힘은 약해졌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사람들은 언제나 본문 앞에서 오래 머물렀다. 시편 기자는 말씀을 ‘주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하는 것’이라 표현했다. 이는 정보를 습득하는 행위가 아니라, 말씀과 함께 살아가는 태도였다. 여호수아에게 주신 명령 역시 동일하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묵상하라.” 말씀은 빨리 이해하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오래 붙들라고 주어진 것이다.
설교자는 본문을 설명하는 사람이 아니라 본문에 붙들린 사람이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이미 성경말씀을 알고 있었지만, 그들의 마음은 여전히 낙심 가운데 있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성경을 풀어 주실 때, 그들의 고백은 단순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그 뜨거움은 새로운 정보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말씀이 그들의 삶을 다시 해석해 주는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본문 앞에 서는 사람은 결국 자기 자신이 말씀을 통해 변화되었다. 예레미야는 말씀을 전하면서 동시에 그 말씀에 가장 깊이 찔린 사람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불같이 사무친다”고 표현했다. 설교자는 본문을 다루는 사람이 아니라, 본문에 다루어지는 사람이다. 이 과정이 생략될 때 설교는 설명은 되지만 증언이 되지 못한다.
인공지능 시대일수록 설교자는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기술은 속도를 요구하지만, 말씀은 기다림을 요구한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불을 경험한 후, 호렙산에서는 강한 바람이나 지진이 아니라 세미한 음성 가운데 하나님을 만났던 것처럼, 본문앞에 서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조용히 하나님앞에서 조용히 머무는 자이며, 하나님의 말씀앞에서 자신의 얼굴을 비춰보는 사람이다.
설교 준비의 핵심은 더 많은 자료를 확보하는 데 있지 않다. 본문을 얼마나 오래 붙들고 있었는지가 설교의 깊이를 결정한다. 반복해서 읽고, 묻고, 묵상하는 시간은 비효율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설교의 뿌리는 바로 그 비효율 속에서 자란다. 말씀은 소비될 때가 아니라, 머물 때 사람을 변화시킨다.
설교는 본문에서 시작해 본문으로 돌아가야 한다. 설교자가 하고 싶은 말을 위해 본문을 이용하는 순간, 설교는 방향을 잃는다. 반대로 본문이 설교자를 끌고 갈 때, 설교는 살아 움직인다.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설교자는 다시 본문 앞에 서야 한다. 그 자리는 여전히 설교가 시작되는 자리이며, 설교자가 다시 하나님 앞에 서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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