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2. 16. 09:21ㆍ생각을 말하다
위기의 순간, 상담자가 알아야 할 사례개념화 9P

9P 항목별 핵심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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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을 하다 보면, 유독 마음이 조급해지는 순간이 있다. 내담자가 힘들다고 말하는데, 그 힘듦이 단순한 감정 표현을 넘어 삶 전체를 잠식하고 있을 때다. 특히 위기 상황에서는 상담자 역시 흔들린다. 무엇을 먼저 해야 할지, 어디까지 들어야 할지, 지금 이 사람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순간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이때 상담자가 붙잡아야 할 것은 해결책이 아니다. 설득도 아니고, 긍정도 아니다. 위기의 순간, 상담자가 붙잡아야 할 것은 사람이 무너지지 않도록 지탱하는 최소한의 구조다.
그래서 위기 상담에서 이론은 화려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단순해야 한다. 9P 상담사례화는 그런 점에서 현실적인 틀이다. 주호소를 듣고, 그 고통이 언제부터 커졌는지 살피고, 이 사람이 어떤 배경 속에서 이 자리에 앉아 있는지 가늠한다. 지금의 상태를 유지시키는 요인이 무엇인지 보고, 그래도 아직 남아 있는 힘이 있는지를 확인한다. 그리고 가장 위험한 문제 하나를 중심에 둔다. 진단은 단정이 아니라 방향이고, 계획은 변화가 아니라 안전이다. 이 흐름은 상담자를 보호하기도 한다. 감정에 휩쓸리지 않게 하고, 조급한 개입으로 내담자를 더 몰아붙이지 않게 막아준다.
이 구조가 실제로 얼마나 중요한지는, 한 내담자를 만났을 때 분명해졌다. 60대 초반의 남성이었다. 수십 년 동안 질병을 앓아왔고, 지금도 몸은 성한 날이 거의 없다고 했다. 상담실에 들어와 앉는 데에도 시간이 걸렸고, 말을 시작하기 전부터 여러 번 한숨을 쉬었다. 에너지가 부족하다는 것이 말보다 먼저 느껴졌다. 질문에 대한 대답은 짧았고, 말과 말 사이에는 침묵이 길었다.
그가 반복해서 말한 것은 하나였다. “혼자가 너무 싫다.” 그런데 그 말에는 기대나 외로움보다는 지친 체념이 섞여 있었다.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민폐가 되는 것 같고, 혼자 있으면 견디기 어렵다고 했다. 밤에는 잠이 오지 않고, 낮에는 기운이 없어 누워 있는 시간이 길다고 했다. 특별히 최근에 큰 사건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몸 상태가 다시 나빠지면서,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더 자주 떠오른다고 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상담자로서 가장 경계했던 것은 섣부른 위로였다. “그래도 아직 괜찮다”, “좋아질 수 있다”는 말은 이 내담자에게 닿지 않을 것처럼 느껴졌다. 오히려 그런 말은 그의 지친 얼굴을 더 굳게 만들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나는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 지금 이 사람이 무엇에 가장 취약한지를 구조 안에서 정리했다. 오랜 질병이라는 배경, 반복된 실망, 줄어든 관계, 흐트러진 생활 리듬, 그리고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에너지. 보호 요인은 많지 않았다. 다만 “그래도 누군가와 이야기하는 건 낫다”는 말 한마디가 남아 있었다.
그날 상담의 목표는 삶을 다시 세우는 것이 아니었다. 오늘 이 시간을 혼자 버티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말의 속도를 맞추고, 한숨이 나와도 멈추지 않고, 침묵이 길어져도 채우려 애쓰지 않았다. 다음에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연결만은 분명히 남겼다. 그것이 지금 이 사람에게 가능한 전부처럼 느껴졌다.
위기의 순간, 상담자가 붙잡아야 할 것은 거창한 개입이 아니다. 이론은 상담자를 정리해 주는 도구이고, 구조는 상담자가 내담자를 함부로 흔들지 않게 붙잡아 주는 손잡이다. 어떤 내담자에게 상담은 희망을 말해주는 시간이 아니라, 오늘을 조금 덜 혼자 보내게 하는 시간이다. 그리고 그런 상담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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