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2. 6. 11:37ㆍ중독이 묻고 성경이 답하다
자살예방상담사와 가륫유다의 가상의 상담

절망 속에서 만난 한 사람을 상상하며
가륫유다는 예수님의 제자였다. 하지만 그는 돈에 눈이 멀어서가 아니라, 복잡한 오해와 기대, 뒤틀린 욕망과 실망 속에서 결국 예수님을 넘겨주는 선택을 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선택은 너무 무거운 결과를 남겼다.
예수님이 붙잡혀가고, 채찍에 맞고, 십자가형이 언도되자 그는 자신이 저지른 일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세상은 그의 이름을 배신자로 기억하겠지만, 그날 밤 그는 한 인간으로서 극한의 죄책감과 두려움 속에서 무너지고 있었다.
성경에는 그가 “뉘우치되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나는 가끔 이런 상상을 해보곤 한다.
“만약 그가 죽음을 선택하기 직전, 오늘날의 자살예방상담사를 만났다면 무슨 대화가 오갔을까?”
사람이 절망의 끝에서 다시 돌아오게 만드는 것은 거창한 교리나 강한 충고가 아니라,
그 순간 함께 울어 줄 한 사람의 따뜻한 말, 그저 옆에 있어 주는 존재일 때가 많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가륫유다라는 한 사람이 상담사를 만났다면 어떤 이야기가 펼쳐졌을지를 가상의 이야기로 그려 보려 한다.
그리고 상담사가 개입했을 때와, 그렇지 못했을 때의 서로 다른 길을 함께 따라가 보려고 한다.
유다의 마음에 귀 기울인 상담 이야기
1. 상담사를 만난 유다 — 살 수 있는 길을 발견하다
어둠이 내려앉은 예루살렘 거리.
예수님을 넘겨준 뒤 며칠 동안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한 유다는 떨리는 손을 꼭 쥐어가며 길을 걷고 있었다.
그의 눈가엔 피곤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고, 마음속엔 끊임없는 속삭임이 들려왔다.
“너는 끝났다. 용서받을 수 없다. 살아봐야 더 고통스러울 뿐이다…”
그때, 누군가 조심스레 다가와 유다에게 말했다.
상담사: “유다님, 많이 힘들어 보입니다.
혹시… 잠시 제 이야기 들어주실 수 있을까요?”
유다는 놀란 눈으로 상담사를 바라보았다.
유다: “나를… 왜 부르십니까?
나는 누구에게도 얼굴을 들 수 없는 사람입니다.
날 내버려 두십시오. 나는… 나는 죄인입니다.”
상담사는 한 발짝 더 다가서지도, 그렇다고 멀어지지도 않은 채 부드럽게 말했다.
상담사: “당신이 지금 어떤 마음인지 알고 싶어요.
그냥, 그 마음을 혼자 짊어지지 않도록 잠시 도와드리고 싶습니다.”
유다의 입술이 떨렸다.
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마침내 묵직한 말을 쏟아냈다.
유다: “나는 스승을 팔았습니다.
은 삼십… 그 하찮은 것에.
그분은 내 이름을 불러주시고, 식탁을 함께하며, 사랑을 주셨는데…
나는 그걸 배신했습니다.
나 같은 사람은 살아있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 말 안에는 자책과 수치심이 뒤섞여 있었다.
상담사는 그의 죄를 평가하지 않았다.
오직 **‘지금 이 순간 그가 느끼는 감정’**에 집중했다.
상담사: “유다님, 당신이 지금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느껴집니다.
하지만 당신의 행동이 당신이라는 사람 전체를 결정하는 건 아닙니다.
당신은 지금 감정의 무게에 눌려 자신을 사형선고하고 있는 것 같아요.”
유다는 눈물을 흘렸다.
유다: “용서받을 수 있을까요…?
아니, 그게 가능하기는 한 걸까요?”
상담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차분하게 말했다.
상담사: “용서라는 게 꼭 ‘바로 해결되는 마법’은 아닐 거예요.
하지만 분명한 건, 지금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해결은 아니라는 겁니다.
살아 있는 동안 당신은 계속 변하고, 회복될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저는 그 길을 함께 찾고 싶어요.”
그날 상담사는 유다의 안전을 위해 가까운 사람들과 연결했고, 위험한 장소에서 벗어나도록 도왔다.
유다는 자책감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죽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살아볼 수도 있다”는 희미한 가능성으로 마음이 조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계속해서 상담을 받았고, 공동체와의 관계 회복을 위해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여전히 상처투성이였지만,
죽음이 아닌 삶을 선택할 힘을 조금씩 되찾고 있었다.
2. 상담사를 만나지 못한 유다 — 절망 속에서 스스로를 놓아버리다
하지만 또 다른 길도 있었다.
그를 붙잡아 줄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던 그날 밤.
유다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스스로에게 중얼거렸다.
“나는 끝났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지금, 내게 남은 것은 죄뿐이다.
내가 사라져야 모든 게 끝난다…”
그의 마음 속에서는 죄책감이 계속 자라나
그를 완전히 삼켜버릴 만큼 커져버렸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죄보다 더 큰 것은 없다고 느꼈고,
자기 존재 전체가 잘못된 것처럼 여겨졌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아무도 자신을 막아주지 않는 그 고독 속에서 스스로 생을 끊기로 결심했다.
만약 그 옆에 누군가 있었다면,
그의 흔들리는 발걸음을 붙잡아줄 단 한 마디라도 있었더라면,
이 비극은 달라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마지막까지 듣지 못했던 말,
그를 살릴 수도 있었던 말은 어쩌면 이런 말이었을 것이다.
“당신은 죄보다 큰 존재입니다.”
“당신은 여전히 사랑받을 수 있습니다.”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하지만 그날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의 절망은 목소리를 얻지 못했고, 결국 비극은 막을 수 없었다.
‘절망의 순간’ 그 곁에 있는 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
이 가상의 이야기는 단순히 성경 속 한 장면을 재해석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보내는 메시지다.
절망의 끝에 선 사람은
논리나 설교가 아니라
한 사람의 공감, 한 사람의 경청, 한 사람의 따뜻한 시선을 필요로 한다.
가륫유다는 역사 속 인물이지만,
우리 주변에는 오늘도 이름 없는 ‘유다들’이 있다.
죄책감, 실패, 상실, 외로움 속에서
“나는 끝났다”라고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이렇게 말해줄 수 있어야 한다.
“당신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잘못이 당신을 규정하지 않습니다.”
“살아 있을 이유는 아직 남아 있습니다.”
“나는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자살예방은 특별한 사람이 하는 특별한 행동이 아니다.
아픈 마음을 그대로 들어주는 용기, 그 마음 곁에 머무르는 사랑에서 시작된다.
오늘 당신 주변에 혹시 조용히 고통을 삼키는 누군가가 있다면
먼저 말을 걸어보라.
그 한마디가 한 사람의 생을 구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한 사람의 생명은 그 어떤 것보다도 소중하다.
본 글을 신학자나 목회자의 입장이 아닌 자살위기상담사라는 관점에서 글을 작성하였습니다. 가륫유다의 자살에 대한 옳고 그름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것이 아님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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