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2. 25. 11:32ㆍ시는 영혼의 울림이다
시치료를 바라보는 개인적 생각

상담실에서 내담자는 자신의 이야기를 조리 있게 설명하지만, 설명이 끝나고 나면 오히려 감정은 더 멀어진다. 이때 언어는 표현이 아니라 방어가 된다. 시치료는 바로 이 지점에서 필요하다. 말이 너무 많아서 감정이 사라질 때, 시는 언어를 다시 감정의 자리로 데려온다.
시치료는 새로운 말을 가르치는 치료가 아니다. 오히려 말을 덜 하게 만드는 치료에 가깝다. 문장을 완성하라고 요구하지 않고, 논리적으로 설명하라고 재촉하지 않는다. 시는 단어 몇 개, 이미지 하나, 리듬 하나로도 충분하다. 임상 현장에서 시가 중요한 이유는, 내담자가 잘 말하려는 시도를 내려놓게 만들기 때문이다. 시 앞에서 말은 다시 느끼는 것이 된다.
시치료가 전제하는 핵심은 단순하다. 인간의 감정은 산문보다 시에 더 가깝다는 믿음이다. 감정은 설명되지 않고, 비유되고, 끊기며, 반복된다. 분노는 논리적이지 않고, 슬픔은 문법을 지키지 않는다. 시는 이 비논리적이고 파편적인 감정의 형식을 그대로 허용한다. 그래서 시는 감정을 다듬기보다, 감정이 머물 자리를 마련해준다.
시치료가 유용한 순간은, 내담자가 감정을 ‘생각으로 처리’하고 있을 때다. 지적 방어가 강한 성인, 말은 유창하지만 감정 접촉이 얕은 내담자, 혹은 상실과 트라우마처럼 말로 풀수록 더 굳어지는 경험을 가진 사람에게 시는 다른 통로가 된다. “왜 그렇게 느꼈나요?”라는 질문 대신, “이 느낌을 한 줄로 써본다면 어떤 말이 나올까요?”라고 묻는 순간, 상담의 깊이는 달라진다.
시치료에서 중요한 것은 문학적 완성도가 아니다. 잘 쓴 시는 치료의 목표가 아니다. 오히려 서툴고, 끊기고, 이상한 문장이 치료적으로 더 중요하다. 그 문장에는 내담자의 현재 상태가 그대로 담겨 있기 때문이다. 상담사는 시를 평가하지 않는다. 해석도 서두르지 않는다. 그저 그 문장이 나올 수 있었던 용기와, 그 문장에 담긴 정서에 함께 머문다. 시치료는 해석의 치료가 아니라 공명의 치료다.
시치료는 읽기와 쓰기, 두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어떤 내담자에게는 자신의 시를 쓰는 것이 부담이 될 수 있다. 이때 이미 존재하는 시를 함께 읽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내담자가 시의 한 구절에 멈춰 서는 순간, 그 구절은 이미 내담자의 언어가 된다. “왜 이 문장이 눈에 들어왔을까요?”라는 질문은, 내담자가 자신의 감정을 간접적으로 말할 수 있게 한다. 이는 직접적인 질문보다 훨씬 안전하다.
연령별로 보면, 시치료는 의외로 청소년과 성인에게 특히 적합하다. 청소년은 감정을 직접 묻는 질문에 쉽게 닫히지만, 시 앞에서는 자기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는 착각 속에서 깊은 정서를 드러낸다. 성인에게 시는 오랫동안 억눌러온 감정을 다시 허락받는 언어가 된다. 노년기 내담자에게도 시는 삶을 정리하고 의미를 통합하는 데 중요한 매체가 된다. 반면 아동의 경우에는 시치료가 단독으로 사용되기보다는 그림이나 놀이와 결합될 때 더 자연스럽다.
시치료는 하나의 독립 이론이라기보다, 여러 심리치료 이론의 접점에 서 있다. 정신역동적 관점에서는 시를 무의식의 상징적 표현으로 이해하고, 인본주의 관점에서는 표현 그 자체의 치유적 가치를 강조한다. 최근에는 트라우마 연구와 정서 처리 이론에서도 시와 같은 은유적 언어가 감정 조절과 의미 재구성에 도움이 된다는 근거들이 축적되고 있다. 중요한 점은, 시치료의 효과가 ‘시’라는 형식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를 매개로 형성되는 치료적 관계와 정서 경험에 있다는 사실이다.
시치료를 사용할 때 가장 주의해야 할 점은, 시를 통찰의 도구로만 사용하려는 유혹이다. “이 시를 쓴 걸 보니 이런 문제가 있군요”라는 해석은 내담자를 다시 방어하게 만든다. 시는 설명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머무는 대상이다. 또 하나의 주의점은 내담자의 속도다. 감정이 너무 빠르게 열리면, 시는 위로가 아니라 부담이 된다. 시치료는 언제나 조심스럽게, 필요할 때만 열려야 한다.
시치료는 사람을 바꾸지 않는다. 다만 사람이 자기 감정과 조금 더 가까이 앉을 수 있게 돕는다. 말이 너무 많아 감정이 사라질 때, 시는 언어를 다시 감정의 자리로 데려온다. 임상 현장에서 시치료가 가진 가장 큰 힘은 여기에 있다. 말하지 않아도 되는 말,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이해. 시는 상담실에서 그렇게 조용히, 그러나 깊게 작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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