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8. 19. 16:36ㆍ생각을 말하다
[연재02] 나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부동산과 관련된 문제로 세 명의 변호사에게 같은 질문을 한 적이 있다. 법률은 내가 잘 모르는 분야였기에 전문가에게 물으면 비교적 분명한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세 사람의 이야기는 조금씩 달랐다. 누가 맞고 틀렸다는 의미가 아니다. 같은 문제를 두고도 주목하는 부분과 바라보는 시선에 차이가 있었다.
그때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 하나가 있었다.
‘변호사니까 법에 대해서는 잘 알겠지.’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완전히 맞는 말도 아니었다. 이혼 사건을 주로 다뤄온 변호사와 형사 사건을 오랫동안 다뤄온 변호사의 경험은 다르다. 같은 법률가라 해도 전문 분야가 있고 축적해 온 경험이 다르다. 박사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흔히 박사라고 하면 ‘똑똑한 사람’을 떠올리지만, 박사는 모든 것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 특정 분야를 깊이 연구한 사람에 가깝다.
돌아보니 나는 그 사람을 보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앞에 붙은 이름표를 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 역시 중독전문상담사로 활동하고 있고, 목회 현장에서 심리검사와 상담을 통해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그렇다고 모든 중독 문제를 전문적으로 다룰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마약이나 도박에 관한 기본적인 지식은 있지만 전문상담의 영역으로 들어가면 부족함을 느끼는 부분이 분명히 있다. 하지만 누군가는 ‘중독전문상담사’라는 이름을 보고 내가 중독에 관한 모든 것을 잘 알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상담 현장에서 법률적인 질문을 받았을 때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내가 답할 수 없는 문제라 변호사에게 문의했는데, 질문을 정리하는 순간부터 한계가 있었다. 법을 잘 모르는 나는 결국 내가 이해한 만큼 질문할 수밖에 없었다. 답변을 받아도 낯선 법률용어가 나오면 그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나는 내가 아는 만큼 질문했고, 내가 이해하는 만큼 답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인가를 ‘본다’는 것도 비슷하지 않을까.
1951년 미국 프린스턴대와 다트머스대 사이에 격렬한 미식축구 경기가 벌어졌다. 선수들이 부상을 입을 정도였고 경기 후 어느 팀이 더 거칠게 경기했는지를 놓고 논란이 생겼다. 심리학자 앨버트 해스토프와 해들리 캔트릴은 이 사건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두 학교 학생들에게 같은 경기 영상을 보여주고 반칙을 살펴보게 했다.
같은 경기를 보았지만 결과는 달랐다. 프린스턴 학생들은 다트머스 선수들이 저지른 반칙을 훨씬 많이 발견했다. 반면 다트머스 학생들에게는 양 팀의 반칙이 상대적으로 비슷하게 보였다. 1954년 발표된 이 연구의 제목은 의미심장하다. ‘그들은 한 경기를 보았다(They Saw a Game).’
같은 영상을 보았는데 왜 서로 다른 경기를 본 것처럼 반응했을까.
우리는 눈앞에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내가 살아온 경험, 알고 있는 지식, 기대와 이해관계, 내가 서 있는 위치가 무엇을 볼 것인지에 영향을 준다. 어떤 것은 크게 보이고 어떤 것은 잘 보이지 않는다. 때로는 보지 않은 것까지 보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관찰은 눈을 크게 뜨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눈앞의 대상을 보는 것과 함께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나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 사람이 회의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기까지는 관찰에 가깝다.
“그 사람은 내 의견에 반대하고 있다.”
여기부터는 나의 해석일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짧은 거리를 너무 쉽게 건너간다. 인사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나를 무시한다’는 판단으로 넘어가고, 답장이 늦었다는 사실에서 ‘나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린다. 직원이 실수했다는 사실에서 ‘책임감이 없는 사람’이라는 평가까지 나아간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한번 그렇게 보기 시작하면 내 판단을 뒷받침하는 장면이 더 잘 보인다. 그 사람이 다음번에도 인사를 하지 않으면 ‘역시 그랬어’라고 생각한다. 반대로 내 판단과 맞지 않는 행동은 쉽게 지나친다.
관찰하고 판단한 것이 아니라, 판단하고 관찰하기 시작한 셈이다.
정보를 읽을 때도 다르지 않다. 같은 뉴스를 읽고도 자신이 믿고 있던 것을 확인하는 문장에 더 눈이 간다. 같은 통계를 보고도 서로 다른 부분을 강조한다. 이제는 여기에 인공지능까지 들어왔다.
AI에게 어떤 문제를 설명하고 “분석해 줘”라고 하면 몇 초 만에 그럴듯한 답을 받을 수 있다. 내가 생각하지 못한 원인을 찾아주기도 하고 다른 관점을 제시하기도 한다. 무척 유용하다.
하지만 그보다 앞선 질문이 있다.
나는 AI에게 무엇을 보여주었는가.
상담 현장에서 내가 이해한 만큼 변호사에게 질문했던 것처럼, AI에게도 나는 내가 본 만큼 상황을 설명한다. 내가 직원의 행동을 이미 ‘무책임’이라고 해석해 놓고 그 관점에서 상황을 설명한다면 AI가 받는 정보 역시 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아무리 뛰어난 분석이라도 출발점에 내가 무엇을 보았는지는 여전히 남는다.
그래서 인공지능에게 묻기 전에 나에게 먼저 물어야 한다.
나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실제로 일어난 일을 보고 있는가, 아니면 그 일에 대한 내 생각을 보고 있는가. 사람을 보고 있는가, 그 사람의 직함과 내가 가진 선입견을 보고 있는가. 상대의 말을 듣고 있는가, 내가 듣고 싶은 것을 듣고 있는가.
좋은 관찰은 모든 것을 정확하게 보는 능력이 아닐지도 모른다. 오히려 내가 모든 것을 보고 있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데서 시작한다.
세 명의 변호사에게 같은 질문을 했던 경험은 내게 정답 하나를 남기지 않았다. 대신 질문 하나를 남겼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면, 지금 내가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은 어쩌면 그 질문에서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질문을 제대로 하려면 가장 먼저 눈앞의 판단을 잠시 내려놓고 살펴봐야 한다.
지금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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