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2. 27. 11:53ㆍ마음을 보다
상담 현장에서 예술심리치료가 필요한 이유에 대해

상담실에서 내담자를 만나며 가장 자주 부딪히는 한계는, 문제가 없어서가 아니라 문제를 말로 옮길 수 없어서 생긴다. “힘들다”는 말은 하지만, 그 힘듦이 어떤 감정인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무엇이 가장 괴로운지는 잘 나오지 않는다. 혹은 말은 아주 논리적인데, 정작 감정은 빠져 있다. 이때 언어는 치료의 도구가 아니라 방어가 된다. 예술심리치료는 바로 이 지점에서 필요해진다. 말이 닿지 않는 영역에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기 위해서다.
우울한 내담자를 떠올려보면, 상담사는 종종 ‘감정이 없다’는 말을 듣게 된다. 실제로는 감정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감정이 너무 무거워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에 가깝다. 이때 “왜 그렇게 느끼나요”라는 질문은 내담자를 더 움츠러들게 만든다. 그래서 우울한 내담자에게는 설명을 요구하는 치료보다, 감정을 다시 느낄 수 있도록 돕는 경험이 필요하다. 음악이나 시와 같은 매체는 바로 이 역할을 한다. 음악은 설명을 요구하지 않고 신경계 수준에서 정서를 흔들고, 시는 긴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한 줄의 언어로 자신의 상태를 담을 수 있게 해준다. 우울을 없애려 하기보다, 우울이 존재해도 괜찮은 자리를 먼저 마련해주는 것, 그것이 예술매체가 하는 일이다.
불안한 내담자는 또 다른 어려움을 안고 온다. 이들은 늘 긴장 속에 있고, 질문을 위협으로 느끼기 쉽다. 생각은 빠르게 돌아가지만 몸은 쉬지 못한다. 이런 내담자에게는 통찰보다 먼저 안정과 조절의 경험이 필요하다. 그래서 불안한 내담자에게는 감각 기반 매체가 도움이 된다. 사진치료는 감정을 직접 묻지 않으면서도 감정에 접근할 수 있는 안전한 거리를 만들어준다. 내담자는 사진 속 장면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느끼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불안과 욕구를 드러내고 있다. 사진치료는 불안을 낮추고, “내 감정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경험을 가능하게 한다.
강박적인 내담자를 만날 때 상담사는 더욱 조심스러워진다. 이들은 통제를 내려놓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고, 잘해야 한다는 압박 속에 있다. 예술치료는 이런 내담자에게 오히려 불안을 자극할 수도 있다. 하지만 동시에, 예술매체는 강박적인 내담자에게 완벽하지 않아도 무너지지 않는 경험을 제공할 수 있다. 모래놀이처럼 정답이 없는 공간이나, 시처럼 문법과 결론이 필요 없는 언어는 통제를 내려놓는 연습이 된다. 이때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며, 상담사는 구조를 최소화하되 안전감은 충분히 제공해야 한다.
심리적 고통은 분명히 느끼지만, 그것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는 내담자들도 있다. 특히 청소년이나 관계 문제를 겪는 성인에게서 자주 보인다. 이런 경우 직접적인 질문은 오히려 벽이 된다. 영화나 사진, 그림과 같은 매체는 내담자가 자기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되게 해준다. 타인의 서사나 이미지에 반응하는 과정에서, 내담자는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감정을 꺼내놓는다. 이때 상담사는 해석자가 아니라, 그 반응에 함께 머무는 사람이다.
연령과 상황에 따라 매체 선택도 달라진다. 아동에게는 놀이와 감각 중심 매체가 자연스럽고, 청소년에게는 사진이나 영화처럼 직접적인 자기노출을 요구하지 않는 매체가 안전하다. 성인에게는 시와 사진처럼 정서와 의미를 함께 다룰 수 있는 매체가 깊이를 만들어준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기준은 나이가 아니라 현재의 정서 상태와 방어 수준이다. 같은 우울이라도, 어떤 내담자에게는 음악이, 어떤 내담자에게는 시가 더 안전할 수 있다.
필자가 임상 현장에서 가장 자주 사용하는 예술매체는 사진치료와 시치료다. 사진은 방어를 낮추고, 감정을 대상화하며, 내담자가 자기 이야기를 안전하게 꺼낼 수 있도록 돕는다. 사진을 해석하려 하지 않는다. 다만 사진 앞에서 어떤 감정이 일어나는지, 어디에서 멈추는지를 함께 본다. 시치료는 언어를 다시 감정의 자리로 되돌린다. 설명이 아니라 비유로, 논리가 아니라 리듬으로 감정을 표현하게 한다. 잘 쓴 시는 필요 없다. 서툰 한 줄, 끊긴 문장이 오히려 더 치료적이다. 더욱이 시와 사진을 함께 사용하여 내담자가 가지고 있는 마음속 감정을 한 장의 사진으로 표현하거나 그 사진속 감정을 한 편의 시로 표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필자는 포엠테라피와 포토테라피를 함께 병행한다.
결국 예술심리치료가 상담 현장에서 필요한 이유는 분명하다. 예술매체는 사람을 바꾸지 않는다. 대신 사람이 자기 자신을 조금 덜 방어하며 만날 수 있도록 돕는다. 말이 막힌 자리에서 다른 문을 열어주고, 통제하던 감정을 잠시 내려놓게 하며, 설명 대신 경험을 허락한다. 상담사로서 내가 예술심리치료를 선택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더 잘 분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담자가 지금의 자기 자신을 견딜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다. 그 순간, 예술은 기법이 아니라 치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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