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2. 25. 11:25ㆍ마음을 보다
도형유형검사·HTP·BGT·가족화·잉크반점검사를 임상 현장에서 바라보는 개인적 생각

임상 현장에서 그림을 그리게 하거나, 도형을 선택하게 하거나, 의미 없는 잉크 반점을 보여주는 순간, 상담실의 공기는 미묘하게 달라진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웠던 내담자의 세계가 이미지로 바뀌고, 방어는 낮아지며, 이야기는 다른 통로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도형유형검사, HTP 검사, Bender-Gestalt Test, 가족화 검사, **로르샤흐 잉크반점 검사**는 겉으로 보기에는 서로 매우 달라 보이지만, 임상 현장에서 상담사가 이 도구들을 사용할 때 생각 이상의 도움이 된다.
이 검사들의 가장 큰 공통점은 모두 비언어적 표현을 통해 내담자의 내면을 간접적으로 만나려는 시도라는 점이다. 질문지를 체크하게 하지 않고, 정답이 없는 과제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이 검사들은 내담자의 방어를 우회하도록 만든다. 특히 언어화가 어려운 아동, 감정 표현이 제한된 내담자, 혹은 말로 설명하면 스스로를 검열하는 성인에게 그림과 도형은 중요한 통로가 된다. 상담사는 이 과정에서 내담자가 무엇을 그렸는지보다, 어떤 태도로 과제에 임하는지, 어디에서 멈칫하는지, 설명을 어떻게 덧붙이는지를 함께 관찰한다. 이 지점까지는 모든 투사적·그림 기반 검사들이 공유하는 임상적 장점이다.
그러나 공통점만큼이나 차이점도 분명하다. 도형유형검사는 구조가 가장 단순하고, 해석 체계는 가장 느슨하다. 내담자의 현재 정서 상태나 자기 인식을 대화로 풀어내는 데는 도움이 되지만, 임상적 평가 도구로서의 근거는 매우 제한적이다. 반면 HTP와 가족화 검사는 그림이라는 동일한 형식을 사용하지만, 상담사가 관찰해야 할 초점은 훨씬 복합적이다. 집, 나무, 사람, 가족의 배치는 단순한 상징을 넘어 관계 경험, 애착의 흔적, 정서적 거리감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림의 ‘의미’가 아니라, 그림을 통해 드러나는 관계다.
BGT는 이들과 결정적으로 다르다. 겉으로는 그림을 그리는 검사이지만, 임상적 목적은 성격이나 정서를 해석하는 데 있지 않다. BGT는 시지각-운동 통합 능력과 신경학적 손상의 가능성을 살펴보는 검사다. 이 검사를 성격 검사처럼 해석하는 순간, 임상적 오류가 발생한다. 로르샤흐 잉크반점 검사는 또 다른 차원의 검사다. 이 검사는 체계화된 채점과 오랜 훈련을 전제로 하며, 무의식적 사고 과정과 정서 조절 양상을 다루는 고난도 도구다. 같은 ‘투사검사’라는 이름 아래 묶이지만, 도형유형검사와 로르샤흐 사이에는 임상적 깊이와 위험도의 차이가 존재한다. 모교수님은 도형유형검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임상 현장에서 상담사가 가장 주의해야 할 지점은, 이 검사들을 ‘사람을 알아내는 도구’로 착각하는 순간이다. 그림 하나, 반점 하나로 성격을 단정하거나 병리를 추정하는 것은 윤리적으로도, 학문적으로도 위험하다. 특히 도형유형검사처럼 구조화되지 않은 도구는 해석자의 확신이 곧 내담자의 정체성이 되기 쉽다. “이렇게 그렸으니 이런 사람이다”라는 말은 상담적 개입이 아니라 규정이다. HTP나 가족화 역시 상징 해석에 집착하면, 내담자의 실제 삶의 맥락은 사라진다. 로르샤흐는 더 말할 필요도 없이, 충분한 훈련 없이 사용하는 것 자체가 임상적 위험이다.
그렇다면 이 검사들을 임상 현장에서 어떻게 사용할 수 있을까. 핵심은 결론을 내리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질문을 풍부하게 만들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다. 도형유형검사는 상담 초기에 관계를 여는 데 사용할 수 있고, HTP와 가족화는 내담자의 관계 경험을 탐색하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BGT는 인지적 기능에 대한 추가 평가가 필요한지를 판단하는 신호가 될 수 있으며, 로르샤흐는 충분한 훈련과 함께 구조화 면담, 객관식 검사와 결합될 때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임상 상담사로서 내가 얻은 가장 중요한 통찰은 이것이다. 투사검사는 사람을 드러내는 검사가 아니라, 사람이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장면을 만들어주는 도구라는 점이다. 그 장면에서 무엇을 보았는지보다, 그 장면 이후 내담자와 어떤 대화를 이어가느냐가 더 중요하다. 검사는 말을 대신해주지 않는다. 다만 말이 시작될 수 있는 자리를 내어줄 뿐이다. 임상 현장에서 상담사는 해석자가 아니라 동행자여야 한다. 도형도, 그림도, 잉크 반점도 결국 상담을 대신하지는 못한다. 상담은 언제나, 그 도구들을 내려놓은 자리에서 시작된다.
그렇다고 이러한 도구가 필요없거나 없어도 된다는 말이 결코아니다. 이러한 도구를 어떻게 사용하느냐, 어떻게 사용되느냐가 이 도구의 목적과 방향성에 영향을 준다는 의미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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