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눅15:11-32)

2024. 8. 7. 11:19인간이 묻고 인공지능이 답하다

(눅 15:11)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눅 15:12)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눅 15:13)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눅 15:14)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눅 15: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눅 15:16)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눅 15: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눅 15: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눅 15: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눅 15: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눅 15:21)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2)하나  눅15:18
(눅 15: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눅 15: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눅 15: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눅 15:25)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눅 15:26)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눅 15:27)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눅 15:28)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행11:2
(눅 15:29)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눅 15:30)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눅 15: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눅 15: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본 설교는 탕자, 아버지, 탕자친구, 탕자의 형의 관점에서 살펴본 포스트를 기반으로 한 원고를 기반으로 작성한 원고입니다. (돌아온 탕자  https://leedonghyun.com/846)

 

 

돌아온 탕자(눅15:11-21)

오늘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탕자의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먼저 자신의 유산을 달라고 하면서 아버지와 싸워 집을 떠난 탕자의 입장에서 성경의 이야기를 바라보고, 두번째는 타지에서 사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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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1 : 용서(눅15:11-32)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우리 삶 전체에 깊이 울려 퍼지는 주제인 용서의 힘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종종 가족 안에서 상처를 경험합니다. 부모는 자녀로 인해 상처를 받고 자녀는 부모로 인해 상처를 입습니다. 아이가 자신의 꿈과 목표를 부모와 공유할 때 이상적인 반응은 지원과 격려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때때로 이러한 이상에서 벗어나기도 합니다. 부모가 허락하지 않거나 지원하지 않으면 갈등이 발생하고 양측 모두 깊고 지속적인 상처를 남기도 합니다. (필자가 결혼을 앞두고 싸운 이야기)

이러한 상처를 그대로 방치하면 불만과 원망이 커져 관계가 단절될 수도 있습니다. 부모가 아무리 자녀를 이해하고 용서하려고 노력하더라도 치유 과정은 고통스러울 정도로 느려질 수 있습니다. 그러한 상처가 말로 표현하거나 대화과정에서 풀어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에 품고 살아갑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부모가 되어 우리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서도 부모와의 상호작용으로 인한 상처를 갖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부모에게 상처를 주었듯이 우리의 자녀들도 우리에게 동일하게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이러한 상처를 치유하려면 인간의 노력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부모와 자녀의 마음에 스며드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누가복음 15장 11-32절의 탕자의 비유입니다. 전통적으로 우리는 탕자의 불순종, 집을 떠난 뒤의 고통과 후회, 그리고 결국 돌아온 탕자의 관점을 통해 이 비유를 해석합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이 탕자의 관점에서 이 이야기를 검토하고 그의 여정 전반에 걸쳐 하나님의 은혜가 어떻게 나타나는지 관찰하면서 더 깊이 파고들도록 초대합니다.

 

1. 왜 탕자는 아버지의 품을 떠나려고 했을까요?


아버지의 품을 떠나기로 한 탕자의 결정은 독립과 세속적 쾌락에 대한 열망에서 나왔습니다. 누가복음 15장 12절에서 그는 상속 재산에서 자신의 몫을 담대히 요구합니다. “아버지여, 유산에서 내가 받을 몫을 나에게 주십시오.” 자녀는 결혼을 하게되면 부모와 독립해야 합니다. 독립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탕자는 아버지가 죽기도 전에 자신의 유산을 달라고 요구합니다. 당시 유대관습에 따르면 말도 안되는 일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그런 요구를 들을 때 가슴이 아팠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요구를 결국 들어줍니다. 

아들은 아버지로 부터 자신의 몫의 유산을 받고 사업을 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아버지로 부터 떠나 마음대로 생활을 하고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아들은 그 생각에 사로 잡혀 집을 떠나오면서 줄 곧 그 생각에 사로 잡혔습니다.  아버지를 떠나 먼 곳에 와서는 아버지의 잔소리와 주변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매일 매일의 삶을 허랑 방탕하게 살아갑니다.

아들의 초기 생활은 사치와 쾌락주의가 전부였습니다.  탕자 주변에는 탕자보다 탕자가 가진 물질이나 돈에 더 관심이 있는 친구들만 존재했습니다. 이들은 탕자가 가진 재물을 한 푼이라도 더 뜯어내려고 혈안이었습니다. 탕자의 입장에서는 친구들이 자신을 좋아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위해 시간을 내어주고 관심을 가져준다고 생각하였읍니다.

이러한 날들이 이어져갔습니다. 어느 순간. 자신이 가진 재물이 줄어들고 사라질 즈음에 물질만 사라진 것이 아니라 탕자 주변의 모든 친구들도 사라졌습니다. 

잠언 21장 17절을 현대인의 성경으로 보도록 하겠습니다. "쾌락을 좋아하는 사람은 가난하게 되고 술과 사치를 좋아하는 사람도 부하게 되지 못한다."라고 했습니다.  탕자의 삶은 쾌략에 빠져서 점점 수령으로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탕자는 지금 무엇이 잘못되고 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아직 깨닫지 못했습니다. 

탕자가 가지고 재물도 줄여들면서 주변의 친구들도 줄어들었고, 마지막에 자기 혼자만 남았다는 사실을 깨닫은 순간. 탕자는 자신이 친구들로 부터 버림받았다는 사실과 함께 외롭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죽을 때까지 같이 할 것 같은 친구들이 모두 사라졌습니다. 바로 그 순간 아버지에게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지금까지 아버지를 떠나 살아온 죄악된 습관이 몸에 빼어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도움보다 자신의 힘으로 뭔가를 해 보고자 하는 생각이 더 앞섰습니다. 

 그런데 상황은 탕자가 원하는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눅15장 14-16절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눅 15:14)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눅 15: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눅 15:16)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첫번째 상황은 흉년이 들었습니다. 흉년이 들면 가진자도 힘들지만 없는자가 더 힘든 시기입니다. 탕자는 드디어 자신이 궁핍해졌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누군가의 밑에 들어가서 일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일은 무슨 일입니까? 바로 돼지를 치는 일입니다. 당시 돼지와 관련된 일을 기피하는 직업중에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을 해야 했습니다. 그 일을 하면 먹는 것 만큼은 해결되겠지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쩐 일이지 그 일을 해도 배를 채우지는 못했습니다. 주는 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인 방법을 쓰고 쓰도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탕자는 회계하거나 돌이키지 않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는 은혜을 베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아버지께 돌아가야한다는 깨닫는 것이 은혜입니다.

성도여러분. 자녀는 부모로 독립해야 합니다.  자신의 쾌략을 위해 독립하려면 실패할 수 밖에 없습니다. 성장과 발전을 위해 정당한 과정을 거치면서 독립해야 합니다. 탕자는 그 사실을 놓쳤습니다. 그래서 그는 실패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2. 깨닫는 것이 은혜입니다. 


탕자는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삶의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품에 있을 때에는 생각지도 못하고 경험하지 못했든 일들이 그에게 일어남으로서 그는 겸손해 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탕자는 돼지에게 주는 음식까지도 갈망하며 인생의 최저점에 도달한 깨닫게 됩니다. 그는 절망중에 이러한 깨닫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깨닫는 것이 은혜입니다. 깨닫지 못하면 이전의 삶을 그대로 살아갑니다. 

탕자는 자기 아버지의 집을 생각하고 그 집에는 종들에게도 먹을 것이 남아돈다는 생각이 머리에 스쳐지나갔습니다. 그 순간 후회와 회개의 불씨가 그 마음속에 떨어졌습니다. 

누가복음 15장 17-19절을 보겠습니다.

(눅 15: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눅 15: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눅 15: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탕자는 3가지를 깨닫았습니다. 첫번째는 이곳에 있으면 죽는다는 사실을 깨닫았습니다.(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두번째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았습니다.(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세번째는 아버지에게 가면 아들이 아니더라도 품으로 살아도 지금보다 더 잘 살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았습니다.

탕자는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합니다. 탕자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잘못했는지에 대해 정확하게 깨닫는 순간, 집으로 돌아게 되었습니다. 탕자는 집으로 돌아갔을 때 아버지가 자신에 대해 거절을 하지 않을까하는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이러한 결정은 아버지에 대한 용서와 화해를 구하는 중요한 순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순간. 우리가 해야 할일은 바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탕자처럼 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품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회복이 이루어집니다. 그렇지 않고 그대로 멈춰버린다면 그 기회는 다시는 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3. 아버지품에 가면 다시 회복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 입장에서 아들의 행동은 마음에 상처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그것을 마음속 깊이 품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아들을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어떨까요. 자식이 마음에 상처를 주었다면 꽁하게 담아두고 담에 보자는 식으로 하고 있다면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본문에 나오는 아버지는 우리와 다릅니다. 아들이 떠난 후 언제나 돌아올지 몰라 매일 밖으로 나가 기다리는 아버지입니다. 하루 이틀이 아닙니다. 수개월이 될 수 있고, 수년이 될 수 있지만 아들이 돌아오기만 기다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드디어 멀리서 돌아오는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는 아들의 모습을 보면서 너무나 가슴이 아팠습니다. 왜냐하면 성공해서 돌아오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지치고 피곤해 보이는 아들, 그 아들이 불쌍해서 그냥 끌어 앉고 울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눅 15장 20절-24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눅 15: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눅 15:21)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눅 15: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눅 15: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눅 15: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아버지는 아들을 단순히 용서해주고 아들의 말대로 일군으로 대해주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아들을 다시 이전 처럼 아들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기회을 주었습니다.  이것은 용서를 뛰어넘는 회복의 축복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불쌍히 여기며 달려가 그를 안고 입맞춤을 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이미 아들을 용서하였습니다. 그의 자잘못을 따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종들에게 좋은 옷을 주고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도록 했습니다. 나아가 잔치를 벌려 기뻐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예전의 우리의 모습이 탕자와 비슷하지 않습니까? 아니면 지금의 모습이 탕자와 닮지 않았습니까? 지금 우리의 삶의 탕자와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더 늦기전에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용서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두 팔을 벌려 우리를 다시 환영하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주님은 우리를 다시 용서하시고 회복 시켜주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성도여러분. 진정한 용서와 치유는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옵니다. 탕자든, 형이든, 자비로운 아버지이든, 우리 모두의 상처를 치유하고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만약 여러분들의 자녀들이 탕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속상하십니까?
만약 여러분들의 마음과 생각대로 하지 않는다고 속상하십니까?
믿음생활을 형식으로 하고 있다고 속상해 하고 계십니까? 

여러분들의 힘이나 노력으로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의 자녀들이 깨닫아야 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우리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다시금 주님앞으로 나오게 하는 길외에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기도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자녀들이 다시 부모님곁으로 돌아온다면 용서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이전처럼 회복된 관계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에베소서 4장 32절의 말씀처럼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하고고 하심같이 용서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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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2 : 용서(눅15:11-32)

오늘은 본문의 말씀을 가지고 용서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부모든 자녀든 우리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입힌 상처를 치유하려면 용서가 필수적입니다.
아이가 부모에게 자신의 소망을 표현했지만 반대나 오해를 받으면 갈등이 생기고 지속적인 상처를 남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상처를 치료하지 않고 방치하면 원한으로 곪아 화해가 불가능해 보일 수 있습니다.
부모든 자녀든 서로간에 이해하고 용서하려는 노력이 따라와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갈등이 해결되지 않는 다면 일평생 큰 상처가 되어 남게 됩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해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탕자의 비유인 누가복음(눅 15:11-32) 말씀입니다. 전통적으로 우리는 이 이야기를 아버지에게 불순종하고 그 행동의 결과를 직면하고 회개하여 집으로 돌아온 제멋대로인 아들의 이야기로 해석합니다. 오늘은 탕자가 왜 아버지를 떠났는지, 왜 돌아왔는지, ​​그리고 탕자가 떠나면서 깊은 상처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그를 어떻게 용서했는지에 초점을 맞춰 용서의 렌즈를 통해  본문을 이해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왜 탕자는 아버지에게 유산을 미리 달라고 했을까요?


당시 아버지에게 자신의 유산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아버지가 죽은 후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아들은 아버지가 죽기전에 이미 자신에게 물려줄 재산을 달라고 요구합니다. 이것은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거부하는 행동입니다. 불순한 행동입니다. 그로 인해 작은 아들은 아버지에게 크나큰 상처를 주게 됩니다. 왜 그 아들이 아버지에게 그런 상처를 주기 까지 하면서 얻고자 했든 것이 무엇일까요? 왜 작은 아들이 그런 말을 하면서 얻은 것이 무엇일까요? 

작은 아들은 돈을 벌어 자수성가를 하고 싶어서가 아닙니다. 단지 아버지를 떠나 마음껏 살고 싶고 자기 마음대로 허랑방탕하게 살고 싶어서 얻습니다. 누구의 잔소리도 없이 터치도 받지 않고 마음껏 누리면서 살고 싶어서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자신의 마음대로 살고 싶어서 부모에게 반응하면서 자신의 유산을 달라고 하였습니다. 

누가복음 15:12-13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눅 15:12)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눅 15:13)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탕자는 집을 떠나면 아버지 눈에서 벗어나면 행복해 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집을 떠나면 모든 자유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믿다가 하나님을 떠나면 행복해 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탕자가 아버지 집을 떠난 것처럼, 아담과 하와는 지혜와 독립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선악과를 먹는 길을 택했습니다(창 3:1-7). 그들의 결정은 하나님과 에덴동산과의 분리로 이어졌습니다. 마치 탕자의 선택이 아버지와 분리되어 집에서 편안함을 누릴 수 있다는 생각처럼 잘못된 선택이 불행한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2. 깨닫는 것은 은혜입니다. 


탕자의 재산이 줄어들자 그 땅에 극심한 기근이 닥쳐 그에게 절박한 상황이 닥쳤습니다. 그는 돼지를 먹이는 일을 맡았는데, 이는 유대인에게 굴욕적이고 굴욕적인 역할이었습니다. 가장 낮은 순간에 그는 자신이 저지른 실수의 심각성과 아버지 집에서 누렸던 풍요로움을 깨달게 되었습니다. 이 깨달음의 순간이 그는 회개의 시간이 찾아왔습니다. 

누가복음 15:14-1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눅 15:14)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눅 15: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눅 15:16)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눅 15: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탕자는 깨닫았습니다. 자신의 비참한 상황이 생긴 이유가 바로 하나님을 떠나 살았던 삶의 공허함과 자신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생긴 것을 깨닫았습니다. 그 자신의 잘못을 깨닫는 순간 그는 후회가 몰려왔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제 아들이 아니라 종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고 고백하였습니다. 그것이 살길임을 깨닫게 된 것이었습니다. 

다윗 왕은 밧세바와 관련된 자신의 죄에 대해 선지자 나단이 직면했을 때 비슷한 후회의 순간을 경험하였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진심으로 회개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게 되었습니다(삼하 12:1-13, 시 51편). 그럴때 하나님께서는 다웟을 용서해 주었습니다.

다윗과 탕자는 모두 진정한 회개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3. 결단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탕자는 회개하는 마음으로 집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자비를 바라면서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는 하늘과 아버지 앞에 자신의 죄를 인정하였고, 더이상 아들의 지위를 되찾기보다는 종의 지위를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하겠다는 결단을 하였습니다. 생각으로만 거치지 않았습니다. 용기를 내어 결단하였고 이를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단계에 머물고 있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알기에 용기가 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포자기 합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부모와 가족에게 준 상처가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용기를 내어 아버지품으로 달라왔습니다.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회개하고 주님앞에 나오면 용서해 주십니다. 진정한 잘못을 깨닫고 하나님에게 은혜를 구하는 마음으로 나올 때 가능합니다. 

눅 15:18-20 절을 보면 둘째 아들의 모습이 나옵니다. 
(눅 15: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눅 15: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눅 15: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탕자는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후회하면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고민하면서 다시 집으로 돌아가려고 결심하게 됩니다. 집으로 돌아가면 상처를 받은 아버지와 가족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아들이 아닌 일군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간청하겠다는 결심을 보였습니다.  

회개란 자신의 잘못을 아는 것에 거치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란 자신의 잘못을 아는 것을 넘어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용서를 구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로 합니다. 정확히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 알아야하고 그것을 고백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럴때 회개의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잘못했다고 말하지만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자신이 누군가에게 용서을 구할지를 제대로 알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확한 인식과 함께 용서를 구할자에게 찾아가서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탕자는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누구에게 잘못했으며, 어떻게 용서를 받아야 할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거기까지가 탕자인 아들이 아버지에게 바랄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아들로 받아줄 것이라는 생각을 해서는 안됩니다. 그 부분은 아버지의 몫입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몫까지 자신이 생각하고 간다면 그것은 월권이고 잘못된 회계입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베드로가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한 일로 인해 깊은 후회와 후회에 빠지는 사건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갈릴리 바닷가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에 의해 복직된 것은 진정한 회개에 뒤따르는 은혜와 용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요한복음 21:15-17).

베드로처럼 탕자의 겸손한 귀환은 아버지와의 관계를 완전히 회복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멀리서 아들을 본 아버지는 가엾은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그는 아들에게 달려가 그를 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아버지의 반응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은혜을 나타냅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이별로 인한 깊은 상처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하인이 아닌 사랑하는 아들로 다시 맞이하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가족 내에서 자신의 자리를 온전히 회복시켜주었습니다. 

누가복음 15:20-24 아직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아들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이제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빨리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가 그에게 입히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서 잔치를 하자.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고 하고 있습니다. 아들은 다시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베풀수 있는 최고의 사랑이었습니다.

창세기 45장에 보면 자신을 노예로 팔았던 형들에 대한 요셉의 용서는 탕자를 향한 아버지의 용서만큼이나 큰 감명을 줍니다. 요셉은 그들의 형제들이 자기를 팔아버리는 사건, 형제에 대한 배신에도  요셉은 그들을 품고 부양하며 그들의 관계를 회복시켰습니다(창 45:1-15). 이러한 은혜와 화해의 행위는 가장 깊은 상처까지도 치유하는 용서의 힘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그 용서가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깨어진 관계로 인해 우리가 짊어진 상처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만 참으로 치유될 수 있습니다.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가 두 팔을 벌려 아들을 환영했듯이,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무한한 사랑과 용서로 우리를 환영하십니다. 그분의 은혜에 우리 마음을 열어 그 은혜가 우리의 상함을 고치고 우리의 영을 새롭게 하는 역사를 경험하시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