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시작하는 사람들/욘2:1-4

말씀과삶 2012.03.07 22:27 Posted by 이동현원장 leedonghyun

다시 시작하는 사람들/욘2:1-4



    미국이 낳은 유명한 사상가 벤쟈민 프랭클린은 '실패'에 관하여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실패가 두려워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사람은 실패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게 살아가는 그의 인생 자체는 이미 가장 큰 실패다"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실패는 누구나 원치 않는 것입니다. 언제나 승리를 원하고 성공을 바랍니다. 그러면서도 사노라면 누구에게나 몇 차례씩은 찾아오기 마련입니다(사업, 입시, 결혼, 자녀교육, 인간관계에서의 처신...) 크고 작은 실패를 우리는 많이 경험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때 중요한 것은 내가 실패했다는 사실(fact) 자체가 아니라 그 실패를 바라보는 나의 태도(attitude)입니다. 여기에 따라서 실패 속에서 성공으로 나아가는 사람이 있고, 성공속에서 실패를 거두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사랑하는 이유 중 하나는 거기에는 항상 승리만 하고 언제나 성공 가도만 달렸던 사람들의 이야기만 적혀있지 않고, 오늘의 우리들처럼 때로는 쓰디쓴 실패를 경험했고, 그 아픔으로 몸부림쳤던 이들의 이야기도 진솔하게 묘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성경속의 하나님은 실패자들을 헌신짝 버리듯이 다루시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그들을 다시 찾으시고 그들에게 「제 2의 기회」를 베풀어 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1. 요나의 경우

    본래 선교사로 부름받은 요나는 다시스행 여객선에 몸을 실은 채 관광객이 되어 도피 행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 요나는 순조로운 여행길로 스스로 자위하면서 하나님의 분부 따위는 새까맣게 잊어버린 채 배 밑창에 내려가서 편안한 잠을 청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요나를 하나님이 가만두지 아니하시고 광풍을 대동하여 가는 길을 막으셨습니다. 이때 오히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 선원들은 자기들의 배에 탄 사람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하여 사력을 다하고 있었고, 심지어는 요나가 자신을 들어 바다에 던지라 했을 때에도 이들은 요나의 생명을 할 수 있으면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최후까지 안간힘을 써보기까지 했습니다. 

    잠든 자를 깨워야 할 자가 잠들어 있었습니다. 어두움을 밝혀야 할 자가 스스로 어두움에 갇혀 있었습니다. 이웃의 아픔에 동참하여 그 아픔을 치료해 주어야 할 자가 이웃을 외면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선교의 실패자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기도에도 실패자였습니다. 사실 그는 폭풍우 몰아치는 배 안에서 이방인 선원들로부터 "일어나 네 하나님께 구하라"(욘1:6) 는 독촉을 받으면서도 기도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입을 열고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그의 기도는 자발적인 기도가 아니라, 자신이 진멸되기 직전, 생의 막다른 골목에 몰리게 되었을 때 어쩔수 없이 드려진 기도였습니다. 지금도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지 않고는 기도할 줄 모르는 가련한 이 시대의 요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위기에 처할 때만 기도하려고 하는 이상한 습성이 우리에게 감추어져 있습니다.
여러분! 요나에게 있어서 물고기 뱃속에서 다시금 하나님을 경험했고 기도훈련을 받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비록 실패했었지만 늦게나마 하나님의 광대하심에 대해 확실히 알게 되었고 늦게나마 그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서 놀라운 기적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요나에게 하나님은 다시 말씀으로 찾아오셨습니다(2:1). 그리고 동일한 일을 부탁하셨습니다(2:2). 하나님은 꼭 요나가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을 통해서 얼마든지 자신의 뜻을 이루실 수 있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외치지 않으면 돌들로 하여금 소리치게 하실 수 있으신(눅 19:40) 분이십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을 때 저 나귀로도 할 말을 하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신데도(민 22:28-30), 그렇게 하시기 전에 실패자들에게 다가오셔서 저들에게 '제 2의 기회'를 베풀어 주시는 까닭은 무엇인가요? 우리 속에 시작하신 일을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시기를 원하시는(빌1:6) 여호와의 신실하신 속성 때문입니다. 비록 한 두번 실패했을지라도 그들을 버리시기 전에 다시 찾아가셔서 second chance를 주시는 것입니다.



2. 베드로의 경우

    여러분은 마땅히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야 할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당시 상황이나 체면 때문에 예수님을 전하지 못하고 마치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처럼 처신한 적은 없었습니까? 성경을 보면 베드로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 주님은 그러한 베드로를 탓하지 아니하시고 크나큰 사랑으로 품어주셨고, 아픈 상처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 후 오순절 성령을 통해 변화된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했던 바로 그 성전 뜰에 서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담대하게 전했습니다. 지난 날 치욕스러웠던 장소에서 승리를 거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도 나름대로의 패배의 장소가 있을 것입니다. 아직도 그곳은 패배의 장소로 남아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형편을 낱낱이 주님께 아뢰면서 주님의 도우심을 청하기 바랍니다. 실패자 베드로에게 역사하셨던 주님은 여러분에게도 동일하게 역사하실 줄 믿습니다.



3. 마가 요한의 경우

    바울과 바나바는 1차 전도여행을 떠나면서 젊은 일꾼 마가를 대동했는데, 바나바의 고향인 구브로를 지나 밤빌리아 지방의 버가에 이르렀을 때에 어인 영문인지 마가는 도중 하차하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1) 자신에게 주어진 보조적 역할(행 13:5, 수종자)에 대한 불만 때문? (2) 선교에 따르는 계속되는 위험에 겁을 먹은 나머지? (3) 안락한 도시 생활에 익숙한 그가 객지 생활의 불편함을 견디기 어려워서? 라고... 어쨌든 젊은 일꾼 하나가 되돌아가 불편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1차 전도여행을 무사히 잘 마쳤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녀와서였습니다. 안디옥으로 도라온 두 사람은 2차 전도여행을 앞두고 마가를 데리고 갈 것인가 말 것인가를 놓고 큰 다툼이 일어나게 되었고, 급기야는 바나바는 자기 생질인 마가를 데리고 고향인 구브로로 내려가고, 바울은 바나바 대신 실라를 데리고 2차 전도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그로부터 마가가 성경에 다시 언급되기 까지는 11-12년의 세월이 흐릅니다.
그동안 마가는 믿음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베드로를 만나 예수님의 생애에 대해 자세히 듣고 최초의 복음서인 마가복음을 기록합니다. 훗날 바울이 로마의 옥중에서 순교의 날을 기다리고 있을 때에 많은 사람이 그의 곁을 떠났지만 오직 세 사람만은 끝까지 바울 곁에 있으면서 그를 도왔는데, 그 중 하나가 마가였습니다.



결론

    한번 실패했다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그 실패의 아픔 속에 얽매여서 다시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 부끄러운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선진들에게서 배워야할 위대한 교훈 하나는 그들이 한번도 실패나 좌절을 경험하지 않았다는 점이 아니라, 그들이 절망적인 상황 속에 던져졌을 때 거기서 철저히 회개하고 새롭게 출발하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요나, 베드로, 마가 요한 이들의 공통점이 한가지 있다면 이들은 모두 "다시 시작한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지난 6개월을 어떻게 살았는지 모릅니다. 급하게 달려오는 중에 벌써 여기까지 왔습니다. 마라톤으로 말하자면 반환점을 막 돌아서서 이제 다시 왔던 길을 골인점을 향해서 뜀박질하는 우리들입니다. 지나온 시간들을 생각해 볼 때 자랑할 것 보다는 부끄러운 것이 많고, 주님 앞에 내보일 것 보다는 감추고 싶은 것이 많은 저와 여러분일는지 모르지만 이제 때묻지 않은 남은 절반, 지난날의 그 실패에 얽매이지 않고, 지난날의 그 불충함과 게으름 때문에 낙심하지 않고 오늘 우리의 손을 잡아주시는 주님의 손을 의지하고 다시 일어나시는 성도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TAG 실패

이방인 문둥병자의 감사/눅17:11-19

말씀과삶 2012.03.07 22:24 Posted by 이동현원장 leedonghyun

이방인 문둥병자의 감사/눅17:11-19


   여러분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은 살아가기가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시대입니다. 왜 이렇게도 힘들고 어려운 세상이 되어 벼렸느냐 한마디로 사람들이 감사를 잃어 벼렸기 때문입니다.
감사가 없는 사회는 점점 어려워지고, 또 어려워지다 보니까 감사하지 못하는 악순환이 계속되어 지는 것입니다.

    어째서 우리 가정에 문제가 생기느냐, 역시 감사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부부가 부모와 자녀가 서로 원망하고 불평하는데 무슨 행복이 그런 가정에 있겠습니까? 가정에서도 서로에 대해서 신뢰하고 서로에게 감사할 때 비로써 가정에 진정한 행복이 찾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누가복음17장에서 보면 우리가 잘 아는 내용, 10명의 문둥병 환자들이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만나므로 해서 평생 문둥병자로서 동네에서, 심지어는 사랑하는 가족으로부터 내어 쫓기어 살아가다가 그렇게도 쓸쓸하게 생을 마쳐야했던, 그들이 이제 예수그리스도 때문에 문둥병에서 치료 받은 이야기인데, 그런데 이 모두 고침 받고서도 그 중 한 사람 그것도 유대인이 아니라 이 방 사람만이 문둥병에서 고침 받음에 대해서 예수님께 찾아와 감사했다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느냐 하니까

    "너희 10명 모두가 다 고침 받지 아니했느냐 그렇다면 나머지 9명은 어디 갔느냐"고 묻고 찾으십니다.

    이 말씀은 '감사하는 사람이 이렇게도 없느냐' , 혹은 '너희들 감사하기를 왜 그렇게 인색하느냐''는 책망적 말씀인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는 우리가 감사 하지 못하고 있습니까?



1. 받은 은혜를 쉽게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처음 은혜 받았을 때는 내가 평생토록 이 은혜를 잊지 아니하겠다고 단단히 다짐합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 마음이 오래가지를 못합니까?

    옛말에도 보면 '원수는 돌에 새기고 은혜는 물에 새긴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누군가 내게 해롭게 했을 때는 10년, 20년,30년 아니 평생을, 그 일을 잊지 아니한 채 마음속 깊이깊이 담아 두면서 잊어버리지를 아니 하면서도, 나에게 잘해주고 은혜를 베풀어 준 것에는 조그만 시간이 지나도 아주 쉽게 잊어버리고 마는 것이 우리의 현주소입니다.

    이것은 우리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은혜와 축복을 받았지만 그 은혜와 축복의 감격이 시간과 세월이 흐르면서 다 희석되어 지고 맙니다. 왜 우리 성도들의 마음에도 원망과 불만이 커져가고 있느냐 그것은 한마디로 고맙고 감격스러웠던 지난날의 추억을 모두 잊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2. 받은 은혜를 은혜로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감사하지 못했습니다.

    10명의 문둥병 자를 모두다 고침 받았습니다. 저들에게는 이것이 얼마나 감사할 일입니까? 그런데 9명의 사람들은 그것을 주님의 은혜로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다만 우연한 사건으로 생각했습니다.
성도여러분. 우리가 지금 숨을 쉬고 있다고 하는 것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는 몇 분만 숨을 쉬지 못해도 죽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마음대로 숨 쉴 수 있는 공기에 대해서 진정 감사하는 사람이 몇이나 됩니까?

    태양, 공기, 물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주셨는데 이 엄청난 은혜를 그냥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니까 감사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께서 사망의 골짜기에 빠져 영원히 멸망당할 저와 여러분을 구원해 주셨는데, 우리는 미련하게도 이 은혜를 깨닫지 못합니다.

    성도여러분, 지금까지 구원의 은총 안에서 살아오게 하심에 대해서 진정 감사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3. 교만과 악한 마음 때문에 감사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교만한 사람, 악한사람은 절대 감사하지 못합니다. 나 똑똑하다 하는 사람 치고, 감사하는 사람 보셨습니까? 그런 사람은 언제나 메사에 불평과 불만이 있을 뿐입니다.

    루터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선한 사람은 있는 것 가지고 감사하고, 악한 사람은 없는 것 가지고 불평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겸손한 사람이며, 진정한 성도이냐? 있는 것 가지고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맥추감사절을 맞는 우리 성도님들 모두 언제나 베풀어주시는 우리 하나님께 진정 감사하는 성도들이 다 되셔서 더 큰 은혜와 축복을 함께 누려 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길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목자가 되십니다.(시편 23:1-6)

말씀과삶 2012.03.07 17:35 Posted by 이동현원장 leedonghyun


하나님은 나의 목자가 되십니다.(시편 23:1-6)


    어느 유명한 인사들의 모임이 있었는데 마침 유명한 배우가 참석하게 되어 사람들이 그에게 멋진 솜씨를 보여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는 시편23편을 낭낭한 목소리로 멋지게 낭송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훌륭한 솜씨에 감탄하며 박수를 보내주었습니다. 

    그러자 이번엔 목사님께 한마디 해주시기를 부탁했습니다.

    목사님도 시편23편을 암송하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님의 목소리는 그리 좋지 못했고 또 멋지게 말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암송이 모두 끝났을 때에는 사람들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습니다. 배우는 목사님의 손을 꼭 잡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그저 시편23편을 알고 있을 뿐인데 목사님은 그 안에 계신 목자를 알고 계시는군요."

    성도 여러분은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과 나는 어떤 관계라고 믿고 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편23편은 다윗만의 시편이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의 시편인줄 믿습니다. 우리가 고백해야 할 "여호와"는 나의 목자십니다.

    사업에 실패한 한 젊은 사업가가 목사님을 찾아 왔습니다.

    "목사님, 저는 사업에 실패하고, 삶을 포기한 사람입니다. 저를 좀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목사님은 그에게 처방을 내렸습니다.

    “시편 23편을 아침에 10번, 점심에 10번, 저녁에 10번 읽으시오.”

    이 젊은이는 그 처방대로 시편 23편을 아침에 10번, 점심에 10번, 저녁에 10번 읽었습니다. 3년쯤 지난 어느 날, 한 성공한 사업가가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목사님께서 알아보지 못하자 신사는 쪽지를 내보이며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3년 전에 목사님께서 이 쪽지로 처방을 내린 후, 저는 다시 일어서게 되었습니다. 이제 저는 성공하여 큰 사업가가 되었습니다. 목사님의 처방대로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가 되심을 믿고 살았더니 부족함이 없게 해주셨습니다."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의 뜻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나의 목자시기 때문에 나는 늘 건강하고, 
    하나님이 나의 목자시기 때문에 나는 부도를 안 당하고, 자동차 사고를 안 당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되셔도 여전히 나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녀야 됩니다.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목자이기 때문에 나는 병중에서도, 혼란 속에서도, 사고를 만나고 인생의 풍파 가운데서도 전혀 부족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오늘 이 시간 다웟이 만난 그 하나님을 저와 여러분들이 만나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1. 하나님은 나를 기르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기르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광야 40년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을 입히시고 먹이시고 보호하시고 지켜주셨습니다. 자신들이 잘 나서 40년동안 산 것이 결코 아닙니다.

    어른들이 자주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들이 혼자서 큰 줄 아냐” 이 말씀은 아이들이 성장한 후 자신이 잘 나서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오만하게 나올 때 하는 말입니다.

    부모들이 희생이 없었으며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였을 텐데 그들은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잘나서 된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음을 깨닫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 2차 세계대전 직후 연합군은 굶주리고 집 없는 아이들을 모아 커다란 캠프 안에서 함께 살도록 했습니다. 거기서 아이들은 배불리 먹을 수 있었으며 보살핌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밤이면 잠을 잘 이루지 못하고 불안해하는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마침내 어느 심리학자가 한 가지 묘안을 생각해 냈습니다. 아이들이 침대 속에 들어간 후에 각자가 손에 쥐고 있을 빵을 한 조각씩 나누어주었습니다. 그것은 먹으라고 준 것이 아니라 그냥 손에 들고 있도록 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그마한 빵 한 조각이 놀라운 효과를 가져 왔습니다. 아이들은 내일 먹을 것이 있다는 안도감에서 평안히 잠들었던 것입니다. 내일 먹을 것을 염려해야만 했던 이 아이들이 내일 염려를 해결 받았을 때 비로소 평안히 잠들었습니다.

    성도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필요함을 느끼기 오래 전에 이미 우리의 필요에 대해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다윗은 이러한 하나님의 공급을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라고 묘사했습니다.
왜 양들이 푸른 초장에 누워있습니까? 그것은 양들이 목자가 주는 먹이를 먹고 더 이상 먹을 수 없을 만큼 포만감에 젖어 휴식하고 있는 모습을 상상케 합니다.

    목자가 양이 무엇이 필요한 것을 알고 미리 준비해 놓는 것 같이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필요를 아십니다.

    다윗은 왕으로서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왕궁에 음식과 재물이 쌓여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능력으로 사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아들 압살롬이 반역해서 광야에 쫓겨나가 누군가가 음식을 갖다주지 않으면 굶어야 했습니다.

    자기의 능력으로 아무 것도, 쌀 한 톨도 만들 수 없었습니다. 여기서 다윗은 깨달았습니다. "그렇구나! 내가 내 목숨을 위해 양식을 공급한 것이 아니구나! 내가 내 가족, 내 부하들을 먹여 살린 것이 아니로구나!" "오! 하나님 아버지! 당신이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셨습니다. 당신이 나를 지금까지 잔잔한 물가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성도여러분, 이 고백이 여러분의 고백이 되어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 하나님은 나를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2절 말씀을 보면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신다”고 했습니다.
세상에는 유혹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은 조금만 한눈을 팔면 쉽게 유혹에 빠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시대 마다 예언자들을 보내고 사상가들을 보내시고 성현들을 보내서 사람들에게 바른 길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우둔해서 자꾸만 그 길을 외면하고 이탈해서 때로 실수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고 실패도 합니다.

    짐승 중에서도 이 양은 아주 우둔한 동물입니다. 양하면 먼저 생각나는 것은 양순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좋게 말할 때 양순이지 이 말은 우둔하다는 말이고 미련하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양은 위험이 닥쳐와도 그 위험을 깨닫지를 못한다고 합니다. 누가 와서 끌어가도 그냥 끄는 대로 끌려간다고 합니다.

    마치 어린아이들과 똑 같습니다. 어린아이들은 과자 사 준다고 하면 그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좇아갑니다. 양순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목자는 양들을 길들여서 아무나 따라가지 못하도록 훈련해서 내 양을 안전하게 지키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양은 대부분 자기의 목자의 말 이외에는 따라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4:4절에서 그런 말씀을 했습니다. “목자가 앞서 가면 양은 그 음성을 듣고 따라 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느니라”

    그런데 거기에도 예외가 있습니다. 양이 목자를 알고 잘 따라가다가도 그 양이 일단 병이 들면 목자의 음성을 듣지 않고 아무나 따라 간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마침내는 위험을 당해서 죽는다고 합니다. 이것이 무지한 양의 말로입니다.

    중동을 여행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세 사람의 목동들이 양떼를 거느리고 시냇가에서 물을 먹이고 있었습니다. 물을 다 먹인 후에 한 목동이 큰 소리로 “멘아 멘아”하고 부르니까 그의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알고는 모두 따라 가더라고 합니다. 또 조금 있다가 두 번째 목동이 “멘아 멘아”하니까 그의 양들이 또 따라 가더라고 합니다. 자기의 양떼를 셀 필요도 없습니다. 자기의 양들만 따라 갑니다. 여서 “멘아 멘아” 라는 말은 아랍말로 “나를 따라 오라”는 말이라고 합니다.

    하도 신기해서 이 구경꾼이 나머지 한 사람에게 나도 좀 불러 보자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래서 목자의 옷을 빌려 입고 지팡이를 들고 양들을 향해서 “멘아 멘아” 하고 큰 소리로 불렀더니 한 마리의 양도 들은 척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3. 하나님은 나를 보호하시는 분입니다.

    다윗은 양을 친 경험이 있는 사람입니다. 목동의 생활을 해 보았습니다. 양을 치다가 맹수들이 와서 양을 물어 가면 물 맺돌을 들고 좇아가서 맹수들을 물리쳤고 좇아가서 붙잡고 함께 싸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의 양을 철저하게 보호하였고 지켜주었습니다.

    그러면서 다윗은 하나님은 마치 그렇게 자기를 지켜 주시는 하나님으로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그런데 그렇게 양순하던 양도 어떤 때는 고집을 부릴 때가 있다고 합니다. 어떤 때는 그렇게 양순하던 양도 매를 자초할 때가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목자의 손에 들린 막대기는 어떤 때는 길을 인도하는 도구가 되지만 또 어떤 때는 양을 때리는 채찍이 되기도 한다고 합니다. 목자는 채찍으로 때려서라도 위험으로부터 구해야 하기 때문에 지팡이를 때로 매로 사용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여러분, 여기 본문을 주의 깊게 보시기 바랍니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라고 했습니다. 여기 ”누이신다“는 말은 원문을 보면 라바츠(rabats)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강제로 눕힌다“(He forces me lie down) 는 뜻입니다. 이를테면 목자는 때로 양을 인도하되 강제로 눕혀 놓아야 할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라는 말은 ”그가 나를 강제로 누이시며” 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때로 강제하실 때가 있습니다.

    성도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시다. 때론 우리가 불순종할 때 주님은 그의 막대기로 나를 때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주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순종하시는 성도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여러분,

    다윗은 수많은 고통과 삶의 풍파를 겪은 사람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겪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안위하시기 때문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어찌할 수 없는 풍파, 어찌할 수 없는 질병, 어찌할 수 없는 문제들이 있습니까? 그러한 풍파속에서도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한 손에는 막대기를 드시고, 한 손에는 지팡이를 드시며 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우리로 지나가게 하십니다. 이 시간 여호와가 목자되심을 진정으로 고백하십시다.

그리할 때 그분의 채워주심이 있습니다.

그분의 인도하심이 있습니다.

그분의 보호하심이 있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탈리아에서 만든 “인생은 아름다워”(Life is beautiful)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습니다. 독일의 나찌군이 유대인들을 무참히 학살하던 2차대전 말 이탈리아의 한 포로수용소에서 독일군에 붙잡혀 비참한 최후를 맞아야 했던 일가족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 것입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유태인 일가족이 독일군 수용소에 끌려갑니다. 수용소에서 아빠와 엄마가 헤어지고 아빠가 한 5살 정도 된 어린 아들과 함께 수용소에 갇히게 됩니다. 아버지는 사랑하는 아들이 수용소의 그 무시무시한 분위기 속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불안함을 느끼지 못하도록 해주고 싶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 가스실로 끌려가서 죽임을 당해야 하는 불안한 수용소 생활에서 어떻게든 아이가 독일군의 눈에 띠지 않도록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영문도 모른 채 수용소에 끌려온 아들과 놀이를 합니다. 아이가 숨바꼭질을 좋아한다는 것을 안 아버지는 수용소 안에서 아이와 숨바꼭질 놀이를 합니다. 아이는 영문도 모른 채 아빠와 숨바꼭질 놀이를 합니다. 아이에게는 이런 제안을 합니다.

    “네가 아빠에게 안 잡히도록 잘 숨어 있으면 탱크를 태워주마.”

    아이는 탱크가 타고 싶다는 생각에 열심히 재미있게 숨바꼭질을 했습니다. 그런데 숨바꼭질을 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아이는 점점 밖에 나가서 놀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아빠는 ‘탱크를 타고 싶지 않느냐’고 아이를 달래서 다시금 아이로 숨바꼭질을 하게 합니다. 아버지는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는 불안함 때문에 눈물을 흘리다가도 아이 앞에 가기만 하면 지금의 상황이 숨바꼭질하는 놀이시간이라고 인식시켜주기 위해서 항상 웃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는 독일군에게 끌려가서 사형을 당하고 맙니다. 아버지가 끌려가 사형을 당할 그 때까지도 숨바꼭질을 하고 있던 아이는 끝까지 숨어 있다가 독일군을 점령하고 들어온 미군에 의해서 발견되어 살아나갑니다.

    그것도 미군 탱크를 타고 수용소에서 빠져나옵니다. 아이는 아빠가 약속을 지켰다고 생각했습니다.

    수용소에서 구출된 그 아이는 장성해서 어렸을 때를 회상하며 글을 씁니다. 그 때에는 왜 아빠가 그렇게 오랫동안 숨바꼭질 놀이를 하자고 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게 바로 사랑하는 자식을 살리기 위한 아빠의 고통스러운 마음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맨날 숨바꼭질을 하며 어두운 곳에서 숨어 지내야 하는 게 재미없고 불평스러웠지만, 자신을 살리고 죽어간 아빠, 그리고 약속한 대로 탱크를 타게 해 준 아빠의 사랑을 어른이 되어서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우리입니다. 목자는 때로 양을 푸른 초장과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기 위해서 먼 길을 가게 할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험난한 길을 통과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가시밭길과 같은 아픔의 때를 견뎌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이유는 양에게 더 좋은 꼴을 먹이고 풍부한 물을 마시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양인 우리는 고난의 길, 험난한 길을 갈 때에는 목자이신 하나님의 계획을 모르고 ‘왜 우리를 이렇게 험난한 길로 인도하느냐’고 불평하고 원망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야속하기도 합니다.

    성도여러분, 그러나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언제나 우리에게 늘 좋은 것을 주시길 원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11)

    언제나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우리 인생의 목자로 모시고 푸른 초장 잔잔한 물가로 인도함을 받는 행복한 양으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어제 설교를 준비하면서 경상도 버전의 시편23편 접하게 되었습니다. 한 번 들어보시면 재미있으면서도 의미가 있음을 보게됩니다.

   “여호와는 내 목잔기라. /그라이 내사 마 / 답답할게 없데이./
    저 시퍼런 풀 구딩이에 / 내사 마 자빠져 자고 / 셔언-한 또랑가로 / 낼로 잡아 땡기신데이 /
    우짜던지 정신 차리고 / 올케 살아라 카심은 / 다 - 당신 체면 때문이시라 카네. /
    내 디질뻔한 골짜 구디의 껌껌한 데서도 / 그 빽이 참말로 여간 아닌기라.
    주의 몽디이와 짝대기가 / 낼로 맨날 지키시고
    내 라이벌 죽일 놈의 문디 자슥들 앞에서 / 내 대가리에 지름을 바르고
    낼로 팍팍 키와 주시니 / 내사 뭔 걱정이 있겄노 말이다. /
    내 인생이 억수로 복잡타 케싸도 / 저 양반이 맨날 지키줄틴께로 /
    내사 마 우짜든지 / 그 옆에 딱 붙어가 / 때리 지기도 안 떠날끼데이.” /

    여러분, 마지막 절을 깊이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 인생이 억수로 복잡타 케싸도
    저 양반이 맨날 지키줄틴께로
    내사 마 우짜든지
    그 옆이 딱 붙어가   
    때리 지기도 안 떠날끼데이.”

    성도여러분, 이 말씀이 여러분의 고백이 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신앙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인생이 아무리 복잡하고 힘들다 하더라도 목자 되신 하나님 옆에 딱 붙어 있으면 아무 걱정 없습니다.
    옆에서 누군가가 때려죽인다고 해도 절대로 목자이신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목자의 음성을 듣고 목자의 인도하심을 따라 푸른 초장 잔잔한 물가에서 행복한 인생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기쁨과 감사를 회복합시다 (살전5:16-18)

말씀과삶 2012.03.07 17:25 Posted by 이동현원장 leedonghyun


기쁨과 감사를 회복합시다 (살전5:16-18)



    한 해의 절반을 지나면서 뒤쳐져 있는 부분이나 떨어져 있는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예배를 회복하고 처음 사랑을 회복하고 기도와 찬양을 회복하고 우리의 사명을 회복해야 합니다. 오늘은 마지막 시간으로 "기쁨과 감사를 회복합시다."는 제목으로 말씀을 증거하며 함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기쁨과 감사의 삶"은 참으로 중요한 성도들의 삶의 특징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세상 믿지 않는 사람들과 근본적으로 달라야 합니다. 그 다른 것의 특징중의 하나가 바로 항상 기뻐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너희는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너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니라 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항상 기뻐하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고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마땅히 기뻐하고 감사해야할 일에 기쁨과 감사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들을 향해서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고 명령합니다.



1. 기쁨과 감사의 삶은 하나님의 명령이요,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택한 백성들, 그의 자녀들이 항상 기뻐하며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라고 명령해 주셨고 또한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우리는 순종해야 합니다.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항상 기뻐하며 감사하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항상 기뻐하며 즐겁게 사는 사람은 건강합니다. 기쁨의 웃음은 몸에서 독소를 제거하고 체질을 바꾸어줍니다. 그래서 항상 웃으며 기쁘게 사는 사람에게는 우울증이나 불면증이나 위장병이 거의 없다고 합니다. 화를 내면 몸 속에 독기가 생기고 웃으면 몸 속에 있는 독기가 몸밖으로 빠져 나온다고 합니다.
잠언서 17장22절 말씀에,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한다" 하였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기쁨의 종교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셨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안에서 크게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기쁨의 삶은 환경이나 소유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처한 환경이 좋았습니까? 아닙니다. 바울이 무슨 좋은 것을 소유했었습니까?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오히려 엄청난 고난을 당하며 배고픔과 추위와 매맞음을 당하며 감옥에 갇혀 고통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사도 바울은 항상 기뻐했습니다. 그가 쓴 빌립보서에 보면 감옥에 갇혀있으면서도 입만 벌리면 기뻐하라, 기뻐하라를 강조했습니다. 왜 이렇게 기뻐할 수 있었을까요? 한마디로 예수님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이요, 생명되시는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의 가슴은 기쁨으로 충만해졌습니다. 너무 기뻐서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온 세상으로 뛰어 다니며 기쁨의 소식을 전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항상 기뻐하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내가 주안에서 크게 기뻐하노라", "주안에서 기뻐하라", "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주안에서 기뻐하라"(3:1).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기쁨의 샘물을 발견하고 그 안에서 언제나 기쁨과 감사가 흘러 넘치는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에게 있어서 믿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지만 또한 사는 것도 중요합니다. 삶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성경이 말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 감사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도 감사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아름다운 사람이고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매력이 없는 사람이고 불행한 사람입니다.

    감사는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을 가질 때 생깁니다.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을 가지면 모든 것이 감사합니다. 비가 오면 비가 와서 감사하고 눈이 오면 눈이 와서 감사합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모든 것이 불만이고 모든 것이 불평입니다. 비가 오면 비가 와서 불만이고 눈이 오면 눈이 와서 불평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누추한 말 어리석은 말 희롱의 말 대신 "감사하는 말을 하라"(엡5:4)고 했습니다. 다윗은 감사의 노래를 부르라고 했습니다. "노래하면서 그 앞에 나아갈찌어다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찌어다"(시100:2,4).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이요 지금도 지켜 보호하심을 받으며 하늘의 영광스러운 소망을 주셨음을 인하여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의 생명을 보존해 주셨음을 인하여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2. 그런데 왜 많은 사람들이 기쁨과 감사의 삶을 누리지 못 할까요?

    그 이유는 우리들의 삶의 주변에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기쁨과 감사의 삶을 파괴하는 요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 속에 있는 지나친 욕심과 탐욕 때문에 기쁨과 감사를 송두리째 빼앗겨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의 가진 것을 족한 줄로 여기지 못하고 더 많이 갖지 못해서 안달하다가 스스로 불행에 빠지는 경우들을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너무도 많이 봅니다.
또한 인간의 교만과 열악한 환경이 우리 행복을 파괴하고 기쁨과 감사를 빼앗아 가는 경우도 너무도 많습니다. 우리의 원수 마귀는 우는 사지와 같이 삼킬 자를 두루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강조하십니다. 우리 인간의 힘과 능력으로는 항상 기뻐할 수가 없습니다. 범사에 감사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세속에 빠져서 원망과 불평만을 하게 되며 불행한 삶을 살게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항상 기뻐하며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너희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강조해 주셨습니다. 즉 기도 없이는 항상 기뻐할 수 없고, 기도 없이는 범사에 감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깨어 기도하며, 쉬지 않고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날마다 체험하며 믿음으로 살아갈 때 평강의 하나님이 함께해 주시고 기쁨과 감사의 삶을 살도록 인도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소원을 이루는 삶/빌2:12-14

말씀과삶 2012.03.07 17:21 Posted by 이동현원장 leedonghyun

소원을 이루는 삶/빌2:12-14


    행동심리학자들에 의하면 사람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것 몇 중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소원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소원이 있습니다. 성공과 실패는 우리의 불타는 소원을 어떻게 성취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대개 다 소원을 가지고 살지만, 종종 어떤 사람은 소원 없이 살기도 합니다. 소원이 없는 사람은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세상의 흐름을 따라 아무런 죄책감 없이 죄악 가운데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방탕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반면 소원이 있는 사람은 목표를 정하고 열심히 삽니다. 목표를 위해 희생하며 삽니다. 이들은 때가 되면 소원이 성취되는 복을 받습니다.


   중고등부 학생들은 좋은 대학 진학하는 것이 소원일 것입니다.
   청년에게 물어보면 좋은 배우자를 만나는 것일 수 있을 것입니다.
   보통 어른들에게 물으면 재물과 명예를 갖는 것이 소원이라고 할 것입니다.
   질병으로 고생하는 사람은 ‘건강’이 소원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행복한 가정’이 소원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좋은 직장을 갖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성도여러분 여러분들은 과연 어떤 소원을 가슴에 품고 있습니까. 그 소원을 어떻게 이룰 것인지 이 시간 생각하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소원을 다시 붙잡아야 합니다.

    미국에서 성공한 백만장자 4천 명을 대상으로 그들이 성공하고 존경받는 인물이 된 비결을 조사했더니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공통점이 나왔습니다. 첫째, 그들에게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습니다. 둘째, 열정적인 소원이 있었습니다. 셋째, 참고 또 참는 인내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소원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을 사랑하십니다.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13절).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우리에게 소원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아기를 낳으면 그 아무것도 모르는 애기를 바라보면서 삽니다. 거기에 소원을 두고 삽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 속에 소원을 심고 일하시고 계십니다. 무엇보다 소원이 가득한 사람 속에서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국민일보에 “꼴찌서 교수가 된 성공비결”이라는 글이 실렸는데 그 주인공은 현재 상지대 자연과학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류종원 박사입니다. 그는 시골 중학교를 졸업했고 고등학교 때도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대학도 충북대 농학과에 예비합격자로 합격되어 꼴찌로 입학을 했습니다. 그는 가난했고, 공부도 그리 잘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그에게 한 가지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 교회에 나가면서 시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 내 인생을 인도해 주시옵소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옵소서”   

    그는 공부를 열심히 하여 장학생이 되었습니다. 국비장학생으로 독일로 유학을 떠나 박사 학위를 받고 고국에 돌아와 대학 교수까지 되었습니다. 그는 지나온 인생을 돌이켜 보고, 모두가 하나님의 축복이었던 것입니다.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는 소원으로 채우시기를 바랍니다.

    성공하는 사람은 분명한 삶의 목표를 정하고 불타는 소원을 안고 살아갑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뜻을 향하여 그 소원이 불탈 때 어떤 조건과 환경에 있을 지라도 하나님은 가능하게 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꼴찌를 교수로 만드십니다. 감옥에 있던 사람을 총리가 되게 하십니다.



2.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가슴에 품기 바랍니다.

    그런데 문제는 소원이 막연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원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소원인가가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소원이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되는지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잠30:7-9)

    아굴이 구한 것, 소원이 무엇입니까? “진실하게 살기를 원합니다”라고 소원을 아뢰었습니다.
소원은 자기만 좋으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아야 합니다.



3.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행하신다고 했는데 어떻게 그럴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은 우리속에 들어오셔서 역사하십니다. 믿음이 있는자에게 하나님이 들어오십니다.

    히브리서 11:1에 믿음은 바라는 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지금 아직 눈에 안보인다 할지라도 믿음이 있으면 바라는 것이 언젠가는 실상으로 나타납니다

    시37:5-6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잠16:3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맡기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힘이 되시고 지혜가 되시고 능력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여러분의 인생을 맡기시기 바랍니다. 소원을 맡기시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시기 바랍니다.



4. 그 소원을 품은 사람은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복 주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소원을 주신다는 것은 기도의 제목도 함께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가진 소원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확신이 섰으면 그다음에는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기도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요일 5:14)

    하나님께서 우리속에 소원을 두신다고 했는데 이 말의 의미는 우리 마음에 기도제목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소원이 주님안에서 이루어지려면 기도로 그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소원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33:3에서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하셨습니다.

    소원이 있는 사람은 기도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품고 기도한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5. 그 소원이 있는 사람은 열심히 삽니다.

     롬12:에 바울은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말씀하십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12:11) 긍정적인 사람, 비젼이 있는 사람은 열심이 솟아나게 됩니다. 벤처기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벤처기업이라는 말은 남이 하던 일을 모험적으로 새로운 것을 발견해서 수입을 거두는 기업을 벤처기업이라고 합니다. 벤처기업의 공통점을 보면 기업의 일군들이 많지 않지만 밤잠을 자지 않고 열심히 연구합니다. 그렇게 열심히 하다보니까 성공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지런하여 열심을 품고 일할 때 복을 받지 않을래야 안을 수가 없습니다. 축복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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